[인터뷰打] 태권도 명문 칠곡中 태권도부 45년사 준비하는 師弟
[심지훈이 만난 사람]
태권도 명문 칠곡中 태권도부 45년사 준비하는 師弟
경상도지역 유일 태권도선수 출신 오광웅에 지도부탁
1971년 3회 경상북도교육감기 대회서 깜짝 단체우승
이후 각종 대회 메달 휩쓸며 태권도 명문중으로 우뚝
환갑 넘은 제자, 내일모레 희수 맞는 스승 의기투합
후배들과 지역 태권도선수 위한 태권도史 발간 준비
칠곡중 태권도부로 읽는 대구경북교양서 될 지 주목
글·사진=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
태권도 명문 칠곡중학교 태권도부(코치 정명화·16기)가 창립 45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창단 멤버를 비롯해 초창기 선수들과 그들을 가르쳤던 사범이 의기투합해 ‘칠곡중학교 태권도부 45년사 발간(이하 45년사)’을 서두르고 있다. 이들에게 45년사(史)는 각별하다. 문자 그대로 역사(歷史)를 남기는 것에 보태 후배들에게 칠곡중이 어떻게 태권도 명문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옛날 태권도와 요즘 태권도가 무엇이 다른지, 진짜 태권도 정신이란 무엇인지 등을 책 발간을 계기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15세던 창단 멤버 6명은 환갑(還甲)이 넘었고, 그들을 물심양면 가르쳤던 사범은 내일모레 희수(喜壽)를 바라보고 있지만, 태권도와 후배들을 향한 열정만큼은 아직도 쌩쌩하다. 솔선해서 45년사를 준비 중인 사제(師弟)를 만났다. 스승은 오광웅(73‧서예가) 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감독으로, 1971년부터 77년까지 칠곡중 태권도부를 맡았다. 오 감독은 1999년 캐나다 애드먼턴에서 열린 제14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때 남녀 동반우승을 이끌었다. 제자는 양보석(56) 대구남부경찰서 봉천지구대장으로, 칠곡중 태권도부 4기 출신이다. 양 대장은 현재 대구지방경찰청 태권도선수단 태경회 회장직도 겸하고 있다.
-칠곡중학교 태권도부 45년사를 편찬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오광웅: 다른 얘기보다도 칠곡중학교에서 바탕이 돼 가지고 컸던 제자들이 모두 건강한 사회인이 돼줘서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어요. 글쎄, 제자들이 자꾸 좋은 일들을 만들어주네요. 나야 뭐 가지고 있는 자료하고 옛날 에피소드나 능력껏 챙겨주고, 실제 일은 여기 양 대장이 다 하죠.
양보석: 요즘 후배들이 태권도부 역사를 잘 몰라요. 그리고 요즘 태권도하고 옛날 우리 때 태권도하고는 많이 다르죠. 칠곡중 태권도부가 만들진 계기라든지, 태권도부가 창단 3개월 만에 전국체전에서 우승하고 단숨에 태권도 명문으로 거듭난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겨 뒷날 후배들이 우리처럼 태권도부 역사를 쓸 때 귀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칠곡중 태권도부가 만들어진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창단 3개월 만에 우승을 했다고요?
양보석: 그 얘긴 오 사범님께 직접 듣는 게 좋겠네요. 사범님.
오광웅: 이야기가 긴데, 역사니까 한 번 들어봐요. 그러니까 내가 1967년 12월 23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하고 거기가 팔달시장 입구인데, 대구 북구 노원동 353번지지. 거기에 원일도장이라고 태권도 도장을 차렸어요. 그 도장에서 저그 아버지가 팔달시장에서 만물상회를 운영했는데, 도정환이라고 매천초등학교 다니면서 초단을 땄어요. 정환이가 칠곡중학교에 진학해서 2학년 겨울 방학 땐데, 나를 찾아왔어요. “사범님 우리 칠곡중학교에 오셔서 태권도 좀 가르쳐 줄 없습니까.” 그러더라고. 그래 내가 “그래 가르쳐 줄 수 있지. 그런데 왜 그러나”라고 물었지. 들어보니 사정이 이래요. 당시 칠곡중에서는 정정웅 씨라고 그 학교 체육선생이 핸드볼을 가르쳤는데, 성과가 안 나왔던 거야. 그래서 정 선생이 정환이한테 태권도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해서 나를 찾아오게 된 거야. 그래가 정환이를 포함해서 창단 멤버로 6명(도정환 강종열 이창호 금재영 장원석 배태명)을 선발했지. 후보 1명 포함해서. 71년 2월 3일인가 4일인가부터 훈련을 시작했어요. 체육관도 없이 운동장에서 수련을 시작했지요. 당시 교장이 손용각 씨라고, 그 양반이 그해 3월 1일에 정식승인을 내줬어요.
-그럼 오 사범님이 체육선생으로 임명되셨다는 얘긴가요.
오광웅: 그런 게 아니라 그땐 무보수로 애들을 가르쳤지. 나는 내 태권도장을 운영하면서.
양보석: 그때만 하더라도 태권도는 비인기 종목이었어요. ‘태권도 배운다’ 하면 죄다 깡패 된다고 집에서도 부모들이 말리고, 학교 선생들도 별로 안 좋아했죠.
오광웅: 맞아. 그때도 박해봉 선생이라고 ‘학교는 공부 잘해 대학가는 게 목적이다. 태권도 배우면 성격이 나빠진다’고 무진장 반대했던 기억이 나네요. 태권도가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김운용 총재가 국기원을 만들고도 10년 지나, 88올림픽이 계기가 됐죠. 그나마 칠곡중 태권도부는 일찍 인정받았죠.
-창단 3개월 만에 우승을 해서였나요.
양보석: 그렇지. 사범님, 그 얘기 좀 자세하게 해주세요.
오광웅: 71년 8월 10일에 제3회 경상북도교육감기 태권도대회가 열렸어요. 이때 사정이 어땠냐 하면, 협성중학교가 1, 2회 대회 연속 우승을 해서 1번 만 더 우승하면 기(旗)를 가져가게 되어있어요. 그걸 우리가 제지했지. 우리가 협성을 꺾고 단체전 우승을 했으니까.
-정확히는 창단 3개월 만에 우승을 한 게 아니라 창단하고 교육감기 대회를 3개월 앞두고 집중훈련해서 우승트로피를 거머쥔 거군요.
오광웅: 시간상으로는 그렇게 되지.
1971년 3월, 칠곡중 태권도부가 창설될 즈음은 아직 대구시가 경상북도로부터 분리되기 전이었다. 경상북도대회라고 하면 대구지역을 포함한 대회를 말한다.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돼 경상북도에서 분리된 것은 1981년 7월 1일이었다. 오 사범에 따르면 70년대 초반 경북에는 포항 영일 안동 김천 등지에 중고교 태권도부가 많았다고 한다. 반면 대구에는 협성고 능인고 대구공고에 태권도부가 있었고, 협성중 대구동중에 태권도부가 있었지만 대구동중은 유명무실해 사실상 대구에선 칠곡중이 2번째로 태권도부를 운영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오 사범은 몇 년 몇 월 며칠, 몇 번지, 당시 교장, 선생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어 설명에 신뢰를 주었다. “사범님 기억력이 놀랍다”고 하자, 양 대장은 호방하게 웃으며 “이게 바로 태권도 정신”이라고 맞받았다.
-아무튼 3개월 만에 우승을 했는데, 그 비결은 무엇인가요. 특별한 훈련법이 있었나요.
양보석: 훈련양이 엄청난 거지. 사범님, 그때도 1회전이 2분30초였죠.
오광웅: 맞아. 원대오거리에서 팔달시장 가는 길에 복개천이 있었어요. 그 아래 하수구에 애들을 데리고 들어갔죠. 정신력 훈련인 거죠. 나는 그때 똥독도 올랐어요. 애들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앞장서고 애들이 뒤따르는 거지. 요즘 해병대, UDT 훈련은 훈련도 아니야. 혹독하게 훈련을 하지 않으면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나.
양보석: 우리 훈련할 때 칠곡중에서 송림사까지 1~3㎏ 되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려가, 송림사 못둑까지 가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지. 왕복 12km정도 됐지. 완전 죽음이에요. 또 운동장에 엎드려서 맨주먹으로, 그러니까 네 발로 걷는 거지. 손가락뼈가 다 드러날 정도야. 철봉 오래 매달리기도 했지. 떨어지면 엄청 맞았지. 그런데 대회 때 강인한 정신력, 지구력, 체중조절 이런 게 필요하니까 힘든 줄 알면서도 죽기 살기로 한거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네요. 지금 그러면 부모 항의가 장난이 아닐 텐데요.
오광웅: 허허, 지금 생각하면 그때 좀 잘해줄 걸 그랬다 싶어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을 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어요. 64년도에 내가 자갈마당 옆에 있는 양조장 건물 2층 서부도장에서 지도사범을 할 때였어. 내가 태권도 선수라는 얘기를 듣고 미8군 캠프워크에서 백인 하나 흑인 하나가 태권도를 배우겠다고 찾아왔어. 근데 얘들이 이미 우슈, 쿵후 유단자야. 특히 흑인 애는 실력자였지. 근데 얘네들은 사범을 테스트 해. 네가 나를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 보겠다 이거지. 그래 내가 어떡하면 저 놈을 이길까 궁리한 끝에 급소를 쳐 한 방에 KO시켰지. 그때 안 거야. ‘아, 내가 실력이 없으면 절대 누굴 가르쳐선 안 되는구나.’ 그게 이미 그때 몸에 밴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수로 뛰는 이상 메달을 따야 고교진학을 할 수 있지. 여기 양 대장도 능인고를 태권도 특기생으로 진학했고, 경찰시험 때도 무도(공채)로 합격했지.
오 사범은 “지도사범은 3~4단을, 사범은 5단을, 대사범은 6단을, 범사는 7단 이상을 가리킨다”며 “요즘은 이런 호칭은 없어지고 사범을 관장이라고 부르는데, 관장(館長)은 집주인(=도장주인)을 가리키는 것이고, 가르치는 사람은 스승 사(師) 본보기 범(範) 자를 써 사범이라 불러야 맞다”고 했다.
-그럼 71년 도교육감기 대회를 시작으로 칠곡중 태권도부가 승승장구한 것인가요.
오광웅: 그렇지요. MBC사장기, KBS사장기, 도교육감기, 전국체전, 소년체전 등에서 메달을 쓸어오다시피 했으니까. 태권도부 덕에 체육교사들이 다들 승진해 갔지.
양보석: 그때는 단체경기는 A, B팀으로 나눠 나가니까, 우승도 하고 준우승도 하면 메달을 많이 갖고 왔지.
-45년사를 통해 이런 이야기들이 담길 것인데, 이것이 요즘 세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광웅: 당장은 아이들에게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인생의 의미를 알아갈 무렵이면 이 기록이 남다르게 다가갈 거라고 믿어요.
양보석: 일단 책이 발간되면, 칠곡중 후배들은 물론 대구에서 선수로 뛰는 후배들에게 태권도선수 1세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판단은 아이들의 몫이죠.
-45년사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기나요.
양보석: 사범님이 기억하는 태권도부 이야기가 좀 더 세밀하게 담길 것이고, 창단 멤버 6인의 기억도 중요하게 다뤄질 겁니다. 그러면 훈련, 시합, 합숙 에피소드가 다뤄지겠죠. 또 요즘 세대들이 잘 모르는 천지 단군 도산 원효 율곡 같은 품새 이야기, 1978년 국기원으로 통합되기 전 무덕관 송무관 한무관 등 10관(館)이 어떤 과정을 거쳐 통합됐는지도 정리해 둘 겁니다.
두 사람에게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 오 사범은 “태권은 밟을 태(跆) 주먹 권(拳)”이라며 “아직도 이 주먹으로 대리석 10장을 격파하는 건 끄떡없다”고 했다. 실제 오 사범은 최근 대구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된 제6차 대구시 태권도 승품‧단 심사대회에서 수련생 학부모 태권도인 등 3,000여명 앞에서 맨주먹으로 대리석 10장 격파시범을 보였다. 16개 미술‧서예단체의 초대작가이기도 한 오 사범은 서실 한쪽 벽면에 전서(篆書)로 새긴 교학상장(敎學相長) 대형액자를 걸어놓았다. 그는 태권도는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오 사범의 가르침이 일방적이기만 했다면, 40년간 그를 따르는 양 대장 같은 제자들은 없었을 것이다. 양 대장은 시종 오 사범에게 깍듯했다.
*이 글은 대구한국일보가 발행하는 월간문화잡지 <엠플러스한국> 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