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窓] '판도라'의 경주(엠플러스한국 1월호)
시사에세이
<판도라>의 경주
/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
지난 주말 영화관에서 난생 처음 눈물을 흘렸다. 강력한 지진으로 경주 월성원전 1호기 폭발사고를 가정한 드라마 영화 <판도라>를 보면서. 나는 내가 흘렀던 눈물에서, 드라마를 보면서 곧잘 눈물을 훔치시던 고인이 된 아버지가 생각나 괜스레 죄스러움을 느꼈다. 중년을 훌 넘어 노년이 된 아버지 몸을 이해 못하고 “아버지는 드라마를 보고도 운다”고 몇 번씩 놀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흘린 눈물이나 아버지의 눈물은 호르몬의 장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중년이 되면서 우리네 삶이란 것, 세상살이란 것이 그 전과 달리 절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국가수뇌부들은 원전이 터지자 우왕좌왕했고, 대통령(김영민 분)에게 거짓보고를 일삼고, 심지어 사고지역 주민대피령을 공표하지 못하도록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같은 시각 사고현장에선 출동한 소방관들과 한수원 직원들이 상부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남의 집 불구경하듯 했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일련의 장면들에서 세월호 사건 때의 국가수뇌부가 오버랩 된 관객이 비단 나뿐이었을까. 이미 영화 <내부자들>이 ‘너무 영화 같은 현실’을 증명한 이 마당에!
내가 <판도라>를 보고 나도 모르게 울어버린 장면은 방사능 물질이 바람을 타고 주민들을 덮쳐오자 무질서하게 내달리기 시작한 인파 속에서 주인공 할머니(김영애 분)가 손자를 온몸으로 지켜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앞으로 바삐 나아갈 때였다. 평소 순종적이었던 며느리(문정희 분)는 방사능 유출사고가 나자 시어머니 고집 탓이라며 노골적으로 원망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졸지에 시어머니는 ‘죽일 년’이 돼버렸다. 시어머니의 고집이란 방사능으로 남편과 첫째아들을 잃었으면서도 악착같이 원전 마을에 붙어산 걸 말한다. 터전이란 남편과 아들 목숨만큼 중하고 무서운 것임을 젊은 며느리는 알 턱이 없었으리라.
나는 <판도라>를 보고 두 분이 먼저 떠올랐다. 경주에는 바르고 마음씨 고운 아내를 내게 준 장인장모가 산다. 지난해 9월 12일 20시 32분 54초에 경주시 남남서쪽 8km 지역에서 역대급 강진(규모 5.8)이 발생해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을 때, 우리집도 초비상이었다. 그날 이후 2016년 12월 14일 17시 20분 34초 현재까지 총 549회의 여진이 이어졌다. 규모 1.5~3.0 미만의 약진이 528회로 절대적이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올 상반기 중에 대지진을 경고했다. 장인장모는 너무 잦은 여진 덕(?)에 이제는 “이쯤이야”하고 너스레를 떠시지만, 내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만약 진원지와 가까운 월성원전까지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강진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엄청난 재앙의 늪에 빠져들게 된다. <판도라>에서 대통령이 묻는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시스템이 있을 것 아닙니까.” 고위관료는 즉답한다. “그런 건 없습니다.” 오싹하다. 진짜 우리를 몸서리치게 하는 건 현실도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대구한국일보가 발행하는 월간문화잡지 <엠플러스한국> 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국일보 2017년 1월 25일자에는 "경주, 작년보다 더 센 지진 올 수 있다"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경주 지진 중간조사 결과가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