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의암 손병희 평전: 격동의 경세가
[신간안내]
의암 손병희 평전: 격동기의 경세가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으로 얼룩진 ‘그’
“□□□가 없었다면 3.1 운동은 없었다고요!”
(손병희)
/한국콘텐츠연구원
최근 한국사 스타강사 설민석 씨의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이 불거졌다. 한 지상파 보도로 불거진 이 논란은 설씨 스스로 ‘지나친 표현이 있었다는 꾸지람은 달게 받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힌 데다, 여전히 대중이 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어 깔끔하게 정리될 것 같지 않다. 이번 논란으로 세간의 이목을 끈 사람은 바로 손병희와 그의 부인 주옥경이다. 손병희는 ‘술판’ ‘행패’, 주옥경은 ‘태화관’ ‘마담’ 등의 키워드와 함께 3.1 운동의 핵심인물로 소개됐다.
이 와중에 손병희 선생 일대기를 다룬 ‘의암 손병희 평전’(김삼웅 지움, 채륜)이 나왔다. 저자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으로 그는 손병희 선생에 대해 “오늘 우리 시대의 사표이고 겨레의 스승으로 삼아 모자람이 없을 것”라고 썼다. 설민석 강의로 촉발된 논란과는 정반대의 내용이 실렸을 것이라 능히 짐작되는 대목이다.
사실 손병희 선생은 한 시대를 살면서 한 인간으로서 한 역할에 비하면 평가가 인색했던 면이 없지 않았다. 인색하다는 건 잘 모른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설씨 같은 에피소드도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아무튼 저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역사적 변혁을 주도한 인물이 손병희 선생”이라면서 “이 세 가지 역사적 과제에 참여하거나 주도한 인물은 의암 선생이 유일하다”고 소개한다.
세 가지 역사적 변혁이란 동학농민혁명, 종교개혁, 3.1 운동을 말한다.
손병희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군 북접 통령으로 10만 혁명군을 이끌고 관군·왜군과 싸운 치열한 혁명가였다. 헌데 대중의 뇌리 속엔 동학농민혁명하면 전봉준, 최시형 정도만 남아 있다.
손병희 선생은 동학 3세 교조로서 서세동점의 격동기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며 민족종교의 발판을 만든 신실한 종교지도자였다. 천도교 창설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종교개혁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헌데 동학하면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와 2세 교조 최시형에 묻히는 경향이 농후하다.
손병희 선생은 또 일제강점기에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대표 32명을 결집시키고, 세계만방에 자주독립을 선포한 기미 3.1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의 선각자였다. 헌데 3.1 운동하면 유관순에 ‘의문의 1패’를 늘 당한다.
이 밖에도 손병희 선생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들을 해나간 경세가(經世家)였다. 일본 망명 시절에는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불러 신진 교육을 시키고, 귀국한 뒤에는 학교를 세우거나 재정이 어려운 수많은 학교에 찬조금을 지원했다.
또 누구보다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만세보’ ‘천도교월보’ 등을 창간했고, 국민의 지혜 돋우기 위해 보성사를 차려 출판을 시작한 인물이다. 이 보성사에서 3.1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
3.1 운동의 三一은 삼위일체의 철학적 용어로 3교단(기독교·불교·천도교)이 일체가 되어서 일으킨 운동이란 의미가 되고, 영토·인민·주권의 3요건으로서 하나의 국가가 성립된다는 의미도 된다. 손병희 선생은 3.1 운동 독립선언문에 서명할 적에 3교단의 ‘영도자’로 추대돼 수위(첫 번째)로 서명했다. 종교계의 거두였던 것이다. 저자는 3.1 운동은 손병희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성사가 가능했을까 할 만큼 그는 인격·신앙심·리더십·인력동원과 자금지원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하나 그간의 인색한 평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까. 이론의 여지가 있는 대목까지도 손병희 선생 편에서 썼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때 낌새를 맡고 들어온 조선인 형사가 의암의 독립정신과 인격에 감화되어 끝내 입을 다물었다’고 했지만, 부인 주옥경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면 조선인 형사에게 발각되자 급히 오천 원을 구해 입막음을 했다는 게 사실에 가깝다. 일종의 매수였던 셈이다. 또 의암이 일본군에 쫓겨 미국 망명을 계획했다가 일본으로 가 후에 일본군과 손잡고 단발령, 양복입기 운동 등 개화운동을 벌인 일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저자는 이를 ‘러일전쟁 이후를 내다보는 고차원의 전략에서 출발하였던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런 대목을 놓고 보면 설민석의 논란도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역사는 그야말로 정답이 없는 것으로, 판단은 애오라지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대구한국일보가 발행하는 월간문화잡지 <엠플러스한국> 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