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뿌리>의 정석

스토리텔링Pro. 심지훈 2016. 5. 5. 22:30


‪#‎<뿌리‬>의 정석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양반 후손의 자세'를 심심찮게 듣고 살았다. 시조, 중시조, 파(派)를 의무적으로 외웠다. 중고등학교 때 어른들을 만나면, "자네는 본이 어딘고?" 질문을 단골로 받았다. "청송"이라고 하면, "무슨 파인가?"이라는 질문을 이어 받았다. "풍덕공파"라고 하면, 어른들은 "역시 뼈대 있는 후손은 다르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런데 머리가 좀 더 굵고, 주체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대학 때 의문이 생겼다. 양반의 체계는 그렇게 굳건한 게 아니었을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에서 비롯됐다. 광해군 때 나라가 어려워 공명첩을 남발해 관직을 주거나, 신분 세탁을 해줬다는 사실 그리고 조선후기 상업이 발달하고, 서양열강의 위협으로 돈만 있으면 누구나 양반이 되었다는 사실 등에서 '과연 조선은 양반사회였을까'를 의심했다.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나는 더 깊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청송심씨들은 왜 이렇게 강성일까. 나는 하나 같이 한 성깔하는 청송심씨들을 보고 '우리 조상들은 진정한 양반이었을까'라고 가문을 향해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오리저널 양반은 아무래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여기다 내 합리적 의심을 품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은 전주이씨 후손인 우리 장모의 성품을 보고서였다. 이 장모의 대찬 성품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이성계 후손은 다들 한 성격하는 것인가. 
나는 이 실마리를 이성계부터 시작해 청송심씨의 기원을 찾아보는 과정을 통해 나름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성계. 조선 건국자. 임금. 하나 그는 변방의 무장이었다. 의리 있고, 뚝심있는, 그러나 배운 건 없는 무장이었다. 청송심씨 역시 그러했다. 나는 그렇게 아는 게 많은 천상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도 청송심씨 내력은 깊이 들여다 보지 않았거나, 당시로선 당신 조상 욕보일 행동은 아예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청송심씨가 양반의 반열에 오른 것은 조선시대였다. 문반으로서가 아니라, 무반으로서였다. 조선시대 양반은 무반과 문반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나는 이제 이 양반이란 표현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왜 양반일까. 조선 건국의 정점에 장군 이성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선은 나라를 설계할 때, 철저하게 고려를 반면교사 삼았다. 무장이 지배하는 사회를 터부시했고, 천민이 권력의 이너써클 안에 들어가는 걸 질색했다. 이성계가 왕이 되자, 고려의 많은 충신들은 두문동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방원은 생각했다. 집에 불을 지르면,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할 거라고. 몇 명은 그렇게 튀어나왔지만, 대부분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셀프화형'을 받았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은 여기서 유래됐다.
조직으로 치면 똑똑한 놈들은 다 떠난 뒤, 남은 패배자들을 데리고 건국한 게 조선이 되는 셈이다. 조선은 무식한 나라였다. 그 무식했던 나라가 신화를 썼다. 무식한 놈들이 새 역사를 만들어갔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는 목은 이색도 결국 그들과 한 배를 탔다. 이색의 후손들은 텅텅거리며 벼슬도 하고, 호강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청송심씨는 조선시대 이너써클에 처음 등장했다. 세종대왕 정비 소헌왕후를 시작으로 조선왕조 500년간 정승 13명, 왕비 4명(소헌왕후 포함), 부마 4명을 배출했다. 
나는 어릴 때, 우리 집안이 '명문가'라고 두루 듣고 자랐다. 그 덕에 명문가 자손은 좀 달라야 한다는 나름의 사명감도 가졌었다. 그 신화는 내 마음 속에서 무너졌다. 그런데 신화는 무너졌으되 궁금증은 마구마구 솟구쳤다. 대체 우리의 뿌리란 무엇인가. 다른 뿌리들을 들여다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날 때마다 틈틈이 공부하러 다녔다. 
그러다 최근 한국성씨총연합회와 연인이 닿았다. 석민영 사무총장께서 귀한 자료를 보내주셨다. 두 권의 책에 우리나라 모든 뿌리가 담겨 있다. 
어찌된 일인지 명문가, 시조, 파를 그렇게 따지는 이 땅에 <뿌리>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 한 권도 없다. 문중 시비에 휘말릴까 저어돼서 일 거다. 그러나 방법론을 잘 모색하면 시대상황과도 들어맞는 <뿌리> 책도 나올 법하다. 나는 그 노력을 한국성씨총연합회 해 보려 한다. 
귀한 자료 보내주신 석 총장께 이 자리를 빌려 고마운 마음 전한다.
/심보통201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