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학교②-부엌살림을 빛의 속도로 늘려가는 아내
결혼학교②-부엌살림을 빛의 속도로 늘려가는 아내
@사진= 아내
아내는 결혼하자마자 부엌살림을 빛의 속도로 늘려가고 있다. 대개는 결혼 전 남편 쪽이 집을 장만하면 아내 쪽이 집 규모에 맞게 혼수로 장만하지만, 나는 살면서 하나씩 갖춰나가고자 생각했다.(형편이 됐더라도 나는 이런 삶을 살고자했을 것이다.) 아내는 이런 내 생각의 저편에 있었다. 모든 게 준비된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기를 원했다. 사실 나는 이 점에 관한한 아내에게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부엌살림을 하나둘 빠르게 늘려가면서 어린애마냥 기뻐하는 아내 모습을 보노라면 못내 그 미안함이 더 커져만 간다.(아내가 나와 같은 생각으로 살림을 늘려간다면 나 역시 행복하겠지만….)
어제도 그랬다. 대목도 아닌데 저녁시간에 택배가 배달됐다. 그동안 웬만한 건 장만했다 싶어 끝인 줄 알았더니 오랜만에 박스가 두 개나 도착했다. 아내가 실실 웃으면서 이실직고하길, 설전에 주문한 집들이용 수저받침세트와 사기국자&받침세트라고 했다. 다른 박스는 아내도 통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데도 박스를 힘차게 뜯어 제쳤다. 수신인이 일단 자신인고로.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아, 00이가 보냈나 보네’라며 얼굴이 환해졌다. 얼마 전 집들이를 다녀간 아내 직장동료가 깜짝 선물로 ‘키친툴(주방도구)세트<사진>’를 보내온 거였다.
아내는 룰루랄라하며 시집오기 전 사용하던 키친툴세트를 들어내고 새것을 그 자리에 두었다.(그러고 보니 기존 것은 툴 걸이가 녹이 쓸고 새것에 비해 도구도 몇 가지 부족해 이빨 빠진 것 같이 보기는 좋지 않았다.) 아내는 그 자리에서 공주처럼 손을 접곤 콧노래를 부르며 두 바퀴를 휘돌았다. 기쁨의 세레모니는 절로 나와야 제 맛이렷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미안함에 곧잘 짜증을 뒤섞어 아내에게 발포하곤 했다.
“또 샀어? 이런 걸 왜 자꾸 사? 있잖아.”
“있긴 뭐가 있어.”
“이런 데다 먹으면 사랑이 두 배가 돼?”
“응. 돼!”
(기가 막힐 지경)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며칠 안 있어 이틀이 멀다하고 택배가 날아들었다. 내용물 중 열에 아홉은 부엌살림이었다. 결혼 전 부엌살림에는 영 관심이 없어보였던지라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거창한 살림을 살려고 이러는지 이해가 잘 안 갔다. 더 이해가 안 갔던 것은 결혼 전부터 사용하던 그릇과 수저를 바꾸고, 멀쩡한 접시를 갈아치우고, 아직 쓸 만한 집게류도 한꺼번에 교체하는 신공을 근 한 달 내내 발휘하는 게 아닌가. 그 와중에 친구들 선물이라며 냄비며, 밥솥이며, 광파오븐레인지 그리고 캡슐커피머신까지 새로 장만했다. 이게 다 뭔가 싶었다.
한 번은 접시를 사야한대서 아내를 따라 백화점을 간 적이 있다. 주방의 세계는 실로 별천지였다. 뭔 놈의 접시가 그리도 다양한지, 뭐가 뭔지를 몰라 구매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내가 이게 뭐고, 요게 뭐고, 저게 뭐라고 설명해주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접시에 붙은 작디작은 가격표였다. 고 작은 가격표에 공(0)이 어찌 그리 많이 들어가는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뭔 놈에 접시 하나에 10만원이 넘는 게 다반사였다. 아내는 그런 접시를 하나가 아닌 세트를 사려는 심사였다. 눈대중으로 봐도 접시 값만 수 십 만원이 될 터였다. 그런데 여자라는 동물이 어디 접시 사러 가서 접시만 사고 오나. 옆에 있는 그릇도 보고, 수저도 보고, 포크도 보고 하다가 지름신이 훅 내리면 냅다 질러대기 일쑤지.
이런 상황은 남편 입장에선 실랑이 벌이기가 참 애매하다. 아주머니 점원이 친절을 가장해 눈치도 없이 찰거머리처럼 딱 붙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주방용품은 대개 조막만하기 때문이다. 가격을 떠나 일단 물건 앞에서면 그걸 갖고 사라마라 하기가 참 그슥하다. 시쳇말로 남자 가오가 안 선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붉은 얼굴로 입 꾹 다문 채로 묵언수행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묵언수행할 때 아내는 해탈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이래서 부부는 전생에 ‘웬수’였다는 말이 생겨났는가도 싶다. 아내는 이날 접시를 사러 갔다가 포크세트도 구매했다. 물론 참 착한 아내는 내게 양해를 구하긴 했다. 코맹맹이 소리로.
“자기~ (포크세트를 들어 보이며) 나 이것도 사도 돼? 응?”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울 자기 최고!”
(내가 아내의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붉은 얼굴을 하고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었을 뿐 뭐, 꼭 사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내는 내 사인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먹었다.)
물론 아내라고 해서 영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내도 아내 나름대로 애로가 상당하다. 우선은 세간을 살아가면서 하나씩 갖추어가는 것도 재미라는 고견(?)을 가진 남편을 만난 게 가장 큰 애로일 터다. 게다가 나는 꼭 그렇게 비싼 주방기구를 사용해야 행복이 두 배가 되는지 심히 불만과 의구심을 갖고 있는 남자다. 진정으로 달콤한 신혼의 맛이란 명품그릇에 식사를 하지 않아도, 재래시장 그릇가게에서 산 저렴한 사기그릇세트이거나 그게 아니도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사용하던 그릇에 밥과 국을 담아 먹어도 행복한 맛이 신혼의 제 맛이 아닐까 했는데…. 아내는 거두절미하고 말한다.
“아니!”
(깨갱)
또 다른 애로는 아내 역시 우리 형편상 그 비싼 기구를 한꺼번에 사들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 사실 자체가 때론 스트레스가 되는 모양이다. 이 스트레스는 대개 아내의 직장동료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비롯되는 듯하고. 이런 현실적 문제를 감내하고 때론 꾹꾹 누르면서 아내는 여전히 안살림을 경영할 채비 중에 있는 것이다.
때론 지인의 선물이 아내의 안살림 경영 로드맵을 바꿔놓기도 한다. 접시와 그릇이 그렇다. 아내가 그릇을 장만하기 전에 아내 친구가 선수를 쳤다. 아내는 단정한 그릇과 접시로 밥상을 차릴 구상을 했지만, 아내 친구는 사철 봄처럼 싱싱하고 활기차게 지내라는 의미에서인지 꽃밭에서 벌과 나비가 노니는 밥그릇, 국그릇, 접시를 단출하게 선물했다. 아내는 고민 끝에 원래 계획을 수정하고 친구가 선물한 접시와 그릇에 필요한 몇 가지를 더 사는 방식으로 식탁을 꾸몄다. 그래서 우리집 밥상에는 늘 꽃이 피어있고, 벌과 나비가 날아다닌다. 특히 밥그릇을 다 비우면 아내 바닥에선 나비가 내 바닥에선 벌이 유유자적하고 있다.
결혼 후 처음에는 아내의 부엌살림 장만이 너무 심한 듯해서 의견을 전하다가 언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그런 통에 아내가 억울해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한바탕 날궂이가 있은 후에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의 길이 좀 더 탄탄하게 다져지고 넓어져 다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는 아내가 기꺼워하며 우리 가정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을 잘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안살림은 아내 차지고, 나는 기껏 보조만 해 줄 뿐이다. 아내 마음이 편해야 음식도 편하지 않겠는가.
사실 비싼 것만 빼면 새로 들이는 물건들은 모든 게 신기한 관찰거리였다. 특히 아내의 절친들이 사준 최신형 밥솥은 무슨 신세계에서 온 로봇 같았다. 푸른빛이 번쩍이고, 밥솥이 말을 했다. 취사를 시작하면 시작한다고, 뜸을 들이면 뜸을 들인다고, 취사가 끝났으면 끝났다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꼬박꼬박 말을 하는 거였다. ‘쿠쿠, 쿠쿠’ 막 이런 소리를 내면서.(아, 이러면 내가 신세계에서 온 사람인 줄 착각할 여성들도 많겠다.)
또 완전 신기했던 것은 캡슐커피머신이다. 초등학교 때 문방구에 가면 한입에 톡 털어 넣는 젤리가 있었는데, 모양이 그것과 비슷한 캡슐을 머신에 넣고 전원을 켜면 2분도 안 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놓는 기계다. 전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적잖이 성가시지만 작은 캡슐 하나를 넣으면 곰방 따뜻한 커피가 쪼르르 나오는 것이 신통방통했다. 게다가 캡슐마다 맛과 향이 달랐다. 이렇게 다른 캡슐이 개당 1,000원씩 10개가 한 묶음이다. 이왕 집안에 들인데다 시중커피보다 3~5배는 저렴하니 아내가 적극 활용해주길 바란다. 커피보다는 차 애호가인 나에게는 이따금 한 잔씩 내어주고.
흔히 결혼에는 ‘로망’이란 단어가 단짝처럼 따라다닌다. 느낌이 말랑말랑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이 단어는 남편보다는 아내에게 깊숙이 개입하는 듯하다. 헌데 결혼에 대한 아내의 로망이란 별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하게 됐다. 아내는 정말 단순하다. 가지고 싶은 물건 앞에서 웃고, 가진 물건을 갖고 서툴지만 몇 시간씩 다양한 요리를 시도한다. 요리 맛을 보면서 ‘우리 남편이 좋아하겠다’고 또 시원하게 웃는다. 그런 아내를 보노라면 내 삶의 방식에 아내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가두려한 점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제 내가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빛의 속도로 부엌살림을 채우는 것은 그만큼의 속도로 남편에게 사랑을 노래하고 싶은 것이리라. 아내도 현실을 알고 주어진 여건 속에서 가정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리라. 난 아내의 세간 늘리기에 박수만!
*오늘의 교훈= 본디 남자와 여자의 사고구조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도 남편이 아내에게 범하는 실수 한 가지는 남편과 가정에 정성을 쏟기 위해 부엌살림을 늘리는 아내를 ‘돈 먹는 하마’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요리로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내가 주방기구를 갖고 싶어 하는 아내보다 늘 앞선다는 사실을 남편들은 잊지 말지니.
2015.2.26 샘머리결혼학교장 심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