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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窓] 우리 정신은 왜 기를 못 필까

스토리텔링Pro. 심지훈 2016. 1. 11. 11:42

[신문 독해①] 우리 정신은 왜 기를 못 필까

1. 

신문은 독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신문이론은 기사는 중학교 2학년 수준으로 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10여 년 전 내가 기자가 되겠다고 하자 선배들이 귀띔해준 기본도 같았다. 막상 내가 기자가 되자(그 전에도 그렇게 느낀 적이 많지만), 중학교 2학년 수준의 기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비문, 오탈자, 띄어쓰기가 정확하지 않은 기사도 적지 않았고, 사안에 따라선 괴발개발인 기사도 보였다. 기자의 실력이 달리기 때문이겠지만, 근본적으로 글쓰기 자체가 녹록지 않기 때문일 터다. 특히 국어맞춤법은 전문가들도 곧잘 실수하기 마련이다.


2.

나는 고2 때부터 신문을 스크랩했다. 처음에는 논술시험을 위해 신문과 억지로 친해져야 했다. '신문 억지로 읽기' 덕분에 대학 4년 내내 나는 우리 과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독특한 학생이 되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기자의 꿈을 갖게 되었다. 선배들의 권유에 따라 또 내 기호에 따라 소설가가 아닌 기자 김훈의 <거리의 칼럼>을 수없이 읽고 습작했고, 중앙일보 이연홍 선배의 글을 읽고 단문의 묘미를 익혔다.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 글을 탐미하기도 했다.


3. 

10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누구의 기사를 읽어가며 분석하거나 습작하지도 않는다. (그럴 시간이 없다.) 다만 스크랩은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도 신문을 찢는 횟수와 분량을 많이 줄였다. 집안 곧곧에 켜켜이 쌓인 그 무게는 기약할 수 없는 미래 쓰임을 위해 보관을 빙자해 방치해 둘 뿐이기 때문이다. 최근 2년 간은 한국일보에 연재됐던 이덕일 <천고사설>을 열심히 분해해 읽었다. 이덕일은 책을 쓰듯 칼럼을 썼다. 나는 책 쓰는 일에 관심을 더 두었다. 지난해부터는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의 <기억할 오늘>을 밑줄 그어가며 재미나게 읽고 있다.


4.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한다는 건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신문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읽는다는 것도 쉽지 않다. 정독은 더더군다나 쉽지 않다. 이 바쁜 세상에, 정보 사통팔달인 세상에 종이신문이나 부여잡고 앉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로 일주일치를 몰아서 볼 때도 있고, 심하면 한 달치를 몰아 볼 때도 있다. 구문읽기의 묘미도 그런대로 괜찮다. 지협적이게 보이던 사안이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읽히기도 하고, 서로 다른 꼭지의 기사가 비교되어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5. 

가령 한국일보 2016.1.8일자 문화면에 실린 <'헬조선' 분개의 시대 함석헌을 불러 내다> 기사는 2016.1.4일자 15면에 게재된 <기억할 오늘-린든 존슨 美 대통령 "위대한 시회는..." 복지의 혁신 플랜 제시> 제하의 기사와 능히 비교되어 읽힌다. 하루하루 신경을 써서 읽고 스크랩해 나갔다면, 8일자 기사를 본 뒤, 4일자 기사를 찾아 읽었겠지만, 이제는 그럴 만한 여력이 내게는 없다. 그런데 좀 느리게 읽는 신문이 되레 효과를 볼 때가 있다.


6. 

나는 8일자 기사를 먼저 읽고, '이 기사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일단 뉴스 밸류 측정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문화면 톱 감은 못된다고 본 것이다. 이 기사는 기자가 좀 주의했어야 했다. 철학(교양) 기사는 결론이 허무맹랑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현실진단이 빼어나지 않을 때도 많다. 이 기사는 '누가' 누구를 말했냐보다 누가 '누구'를 말했냐를 보고 뉴스 비중을 가늠했다.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가 재야학자 함석헌을 이야기했다.


7.

죽은 함석헌을 강단(주제)에 올린 것은 김 교수다. 함석헌 자체가 괜찮은 뉴스거리라면, 그 다음은 김 교수의 발언내용이 뉴스가 되느냐를 가늠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김 교수의 말은 허무맹랑하다. 특히 대안은 하도 싱거워서 입에 가져다 될 수도 없다. '상생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각성해야 한다'는 게 결론이다. 이걸 곧이곧대로 기자가 옮겼다. 기사 내용에선 모순처럼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김 교수는 "함석헌이 발견한 진리는 사랑"이라며 "힘이, 권력이 시키는 대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면 우리에게 수난이 있었을 리 없을 텐데, .....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난을 받아왔으며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해 왔다는 의미"라고 했다. 우리에게 수난이 없었을 전제가 당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힘이, 권력이 시키는 대로 살아온 당대 사람들의 삶 자체가 수난 아니었나!


8.

기사를 갖고, 김 교수 강의를 추리면 이쯤 된다.(그래도 논리적으로 말은 좀 안 된다.) 

"우리는 이상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진단1) 이상은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진리입니다.(해설1) 돌이켜보면 권력에 수긍했을 때는 수난도 없었지만, 우리 역사에 수난이 있었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해설2) 이상을 잃은 채 수난과 고난을 반복하는 상태가 헬조선입니다.(진단2) 이상을 가집시다. 백성이 각성하고 생각하고 씨알이 되어야 합니다.(대안1) 함석헌 선생이 말씀하신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핵심은 개인부터 살아 있는 진리를 찾아 각성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대안2)"


9. 

어떻게 각성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은 그것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 다음 구체적인 행동이 없다. 철학이란 고상한 옷을 입은 그럴싸한 이야기에 말린 기사다.



10.

그런 한편, 4일자 린든 존슨 대통령 기사는 왜 한국인들이 우리 정신을 갖고 각성하기가 힘든지를 가늠케 한다.


11.

“위대한 사회는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누리느냐를 묻는 사회입니다. 그 사회는 부의 축적뿐 아니라 어떻게 부를 쓸 것인지를, 얼마나 빨리 나아가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향해 갈 것인지를 먼저 묻는 사회입니다. 지금 이 나라는 그 첫 심판대에 섰습니다.”

“그(위대한) 사회는 국가의 선물도, 대통령 개인의 창조물도 아닙니다. 모든 시민, 모든 세대가 목표를 공유하고 용기를 갖고 나설 때 비로소 열립니다. 자유가 그러하듯, 그것은 미완의 끝없는 도전을 요구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도전을 받아들입니다.”(존슨 대통령 1965.1.4 의회 연설)


12. 

그의 정책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과 해리 S. 트루먼의 ‘페어 딜’을 심화한 거대한 사회복지 혁신 플랜이었다. 그는 64년 대통령 선거에서 역대 최다 득표율인 61%로 당선됐다. 연방 하원(295대 140)도 상원(68대 32)도 민주당이 압도했다. ‘위대한 사회’를 향한 시동의 자신감도 물론 거기서 비롯됐을 것이다.(기사 중 팩트와 최윤필 기자의 해석)


13.

존슨 대통령은 말했고, 구체적 계획이 섰고, 행동으로 이어졌다.


14. 

존슨 연설에는 철학이 없고, 함석헌 정신에만 깊은 철학이 있는가. 온전히 우리 정신을 갖고 정신 차리기 무진장 어렵다는 건 서구화된 생활양식이란 우산 아래에서 아무리 옛 화법의 비를 즐긴다고 해도 그 비가 감성을 자극하며 보듬으려는 대상이기 보다, 눅눅한 장마처럼 어서 피하고 싶은 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15.

세상이 혼탁한 것은 맞는데, 돌파구의 묘책 찾기는 난망해 보인다. 우리 언어가 참 버겁게 느끼진다.

/심보통 2016.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