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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행복등가론

@20160617


#행복등가론

나는 '행복등가론'을 갖고 있다. 이것의 요체는  '신이 인간에게 주신 행복의 총량은 같다'는 것이다. 이건 기자로 첫 직장생활을 한 결과이다. 비록 5년 2개월이란 짧은 기자생활이었지만, 10년 같은 5년을 보냈다고 자부할 만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취재했다. 새벽 6시에 나가 새벽 2시에 귀가하는 삶의 원동은 기자의 '사명감'이었다. 어떤 이유로 나는 그 사명감을 헌신짝처럼 버렸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내게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해준 일종의 스승과도 같았다. 그 중 가장 큰 가르침이 바로 행복등가론이란 것이다. 

5년 2개월의 기자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명함첩을 보니 받아 정리해 둔 명함만 3,000명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명함까지 합하면 대략 5,000명은 만나 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름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됐고, 그 눈은 시시때때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통해 교정되고, 확장되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안 계시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스스로 장고를 거듭해 생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에게는 어머니가 있고, 누나가 있고, 형이 있고 그리고 아내가 있어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가족 중 행복등가론에 동의하는 사람은 어머니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내가 말하는 행복등가론은 나름의 기준에 입각해 당장에는 누가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우열을 가리면서 속상해 하고, 잠깐의 기쁨에 취하기도 하지만 살만큼 살아보면 행복이란 거기서 거기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살만큼 살아보지도 않은 내가 그걸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느냐. 그에 대한 나의 답은 명료하다. 명함첩 기준으로 3,000명을 만나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더라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의 고비는 있어 왔고, 누구나 바동거리며 살아도 어느 때엔 조금 나은 삶을 맛보기도 하고, 썩 넉넉하지는 않아도 어느 결에 부쩍 자란 자식이 첫 월급 탔다고 내복을 사오는 삶은 거개가 비슷하더란 말이다. 
해서 내가 일찍이 깨달은 것은 인생 하루이틀 만에 끝나지 않는다는 거고, 진짜 행복은 죽을 때 돼 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나는 행복이란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빠르고 조급하게 이루려는 마음을 뒤로 하고, 천천히 묵묵히 가는 삶으로 전향했다. 행복전향자가 된 것이다. 
최근 우리집엔 두 번의 이사가 있었다. 누님이 이사하고, 그 다음 형님이 이사했다. 나는 그 이사 현장을 두 발로 뛰어다녔다. 행복등가론의 실체를 우리 가족 내에서 추적하는 일환이었다. 
강사생활 15년 만에 교수로 임용된 누님의 기쁨은 시간강사로서 받은 서러움과 실은 한 짝이었음이, 하나의 행복 실체가 드러났다. 누나는 최종 합격 전화를 받고 기뻤을 것이다. 

형님은 20대에 1평 남짓한 신림동 고시원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해 원룸으로, 원룸에서 다시 묵은 아파트로, 묵은 아파트에서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형님 역시 무척 기뻤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 가족이지만 누님과 형님은 인간 승리자다. 하나 진짜 승리자인지는 죽을 때 돼 봐야 안다. 신이 준 상이자 벌이다. 
누님이 이사할 땐 참 볕살이 좋았다. 형님이 이사할 땐 꽃샘추위가 귓불을 할퀴었다. 두 번의 이사가 끝난 이튿날 아침, 전역에 소복이 하얀 눈이 쌓였다. 우리집 15층에서 바라본 초등학교 운동장은 마치 백지 도화지 같았다. 바지런히 살아 멋진 그림 그려보라는 것 같았다. 나는 볕살도 좋고, 꽃샘추위도 좋았다.
/심보통 2017.3.7


*이 글은 특별히 회임한 아내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