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실사회학.com/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누님은 이렇게 물었다: 책을 읽어야 할 까닭


#누님은 이렇게 물었다: 책을 읽어야 할 까닭


누님은 대학강사다. 국문학 박사(어학)다. 시대를 잘못 만나 그렇지, 가르치는 실력이 상당해 대구, 대전, 부산 등지를 오가며 속칭 '봇따리 장사'로 제법 잘 나간다. 하지만 이렇게 산 지 10년이 넘어가면서 기력이 쇠한 탓인지 몸에 이상이 생긴 듯하다. 내 마음이 짠하다. 그래도 누님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좋다고 하니 퍽 복된 일이란 생각이다. 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몇 안 됨을 잘 알기에 하는 얘기다.


어젯밤 누님은 강의 준비를 하면서 내게 물었다. "훈아, 학생들이 책을 왜 읽어야 할까?" 글쓰기와 취업 관련해서 물은 게 아닌가 했다. 나의 대답은 이랬다. "책? 제 곤조를 갖기 위해 읽는 거지." 내 대답이 다소 엉뚱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누님은 "그게 뭐니?"라고 뒤뚱하게 되물었다. 일본어인 곤조는 우리말로는 '근성'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근성이 있어야 소신이 생긴다. 근성 없는 소신은 소신이 아니다.


권성 언론중재위원장이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신은 깊이가 있어야 소신이다. 준비되지 않은 소신은 언제든지 독단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동의한다. 그래서 부러 메모해 두었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모르긴 몰라도 권 위원장은 독서 꽤나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 짐작됐다. 우리는 흔히 독서를 통해 인성을 함양한다고 한다.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양서를 고르는 안목이 없다면 독서는 도로아미타불이다. 그 시간에 생의 전선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찐하게 우리네 인생을 알아가는 게 훨씬 낫다. 얄팍한 지식이나 쌓겠다고 독서를 하겠다는 건 썩 좋은 자세가 못 된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알면 얼마나 알고 간다고 독서로 앎을 운운하는 것인가. 독서로 지식을 쌓겠다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일 뿐이다. 어제 '세계 책의 날'의 맞아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평균 독서량이 새삼 화제가 됐다. 평균 1.2권. 실시간 검색순위 상위에 랭크됐다. 


나는 이 수치가 회자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바로 '우리는 진정 책을 읽어야 할 까닭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는 누님의 질문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독서를 해야 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삶의 확신, 자신, 소신을 갖기 위해서여야 한다. 독서를 통해 단순한 지식으로서 앎을 이야기하겠다면, 누구나 지칠 수밖에 없다. 그 방대한 양을 어찌 섭렵하고 죽겠는가. 더군다나 이 통섭의 시대에 말이다. 


확신, 자신, 소신의 공통점은 깊이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우리 삶의 깊이를 관조할 능력을 갖게 된다. 이는 단순한 지식쌓기의 일환으로써 독서로는 언감생심이다. 타자의 삶 속에 나를 넣어보는 것으로서 가능하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삶에 들어가 보는 것, 여기와 저기의 상황에 처해보는 것. 우리는 그 경험으로써 우리네 삶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타자를 알고 대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은 이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것이다. 그저 껍데기 같은 지식으로 알은 체하고 나대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바보가 된 스페셜리스트(한 가지밖에 모르는 전문가)보다 제너럴리스트가 백 배 낫다고 일갈하는 것이다.


독서는 일상의 행복을 위한 시뮬레이션이라 여겨야 도움이 된다. 제도적 학제 속에서 가방끈이 짧은 사람이나, 긴 사람이나 각자의 위치에서 '두루섞임'을 헤쳐나가야 한다. 이때 '두루섞임'은 가방끈이 길다고 해서 유리한 것도 아니다. 생의 전선에 뛰어든 순간, 상대를 얼마나 잘 알고 대하느냐의 문제가 최대 관건이 된다. 물론 그전에 '내 꼴'을 간파하는 것이 먼저다. 그 역시 독서를 통해 가능하다. 옳은 독서가 밑거름이 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유리한 건 이웃들에게 상처를 줄 기회와 시간을 줄인다는 점이다. 원석을 깎고 다듬어야 보석이 되는 것처럼, 우리네 거친 인격도 깎이고 다듬어져야 비로소 훌륭한 인품을 갖추게 된다.


책을 읽다 보면 간디의 말이나 대처의 말이나 성인의 말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거릿 대처는 생전에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했고, 대처보다 앞선 시대를 살다 간 간디는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 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 행동은 네 습관이 된다.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고 했다. 그 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석가모니는 불교경전에 이렇게 새겨놓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이고, 마음에 따라 세상은 만들어진다. 마음은 생각의 지향이다." 


독서를 통해 이 경구를 외우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이 말의 숨은 뜻을 곰곰이 곱씹어보고, 실천해야 비로소 독서한 보람이 있는 것이다. 배운 분이나 덜 배운 분이나 머리가 하얘지면 하시는 말씀이 있다. "옛날 말 중에 틀린 거 하나 없다!" 내가 아는 횟집 사장님 한 분은 얼마전 나와 점심을 하면서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들려주었는데, 그의 말에는 간디의 촌철살인이 유영했다. 싱크로율 99%였다. "사장님 간디를 아세요?" "누구요?" "마하트마 간디요." "그 사람이 누구죠?" 힘겹게 몸으로 배운 세상 이치는 값진 것이긴 하지만 대단히 아파 가슴에 상처로 남기 십상이다. 횟집 사장님의 삶이 그러했다. 독서는 그걸 알아가는 시간과 아픔을 덜어주는 보조제다. 


독서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책을 읽는 건 야산을 오르는 것에 불과한 일이다. 좋은 책을 고르는 일이야말로 악산의 봉우리를 정복하는 것인 양 녹록지 않은 일이다. 책의 수준과 범위를 정하는 일은 또다른 산이다. 독서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그래도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꾼다. 책을 집어들어야 할 이유다. 다행히도 독서는 오리무중은 아니다. 올해에는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이 좀 향상됐다는 소식을 접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