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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사회학.com/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간디처럼 위기를 돌파하라


# 간디의 운명적 순간
사람의 운명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나의 사건이 한 개인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하고, 살다 보니 운명이 정해진 것처럼 일생을 살다 가기도 한다. 그런데 웬만한 사람은 생의 운명적 순간과 꼭 한 번은 맞닥뜨리게 되어 있다. 

간디 역시 그러했다. 간디는 영국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스물둘에 변호사가 됐다. 한 마디로 잘 나갔다. 그에게 운명의 순간은 스물넷에 찾아왔다. 의뢰인을 대리해 남아프리카로 가던 기차 안에서 일어났다. 

그의 머릿 속엔 온통 소송뿐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사건과 관련된 메모를 펼쳐놓고 분석하고 정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여행은 순조로워 보였다. 1등칸 좌석이 장거리 여행에 따른 피로감을 덜어주는 듯했다.

그런데 몇 시간 후 기차가 정차하고, 1등칸으로 한 백인 남성이 들어오면서 모든 게 헝클어졌다. 그의 여정은 물론 삶의 방향까지 꼬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살면서 실타래가 복잡하게 꼬인 것처럼 삶이 꼬인 것 같아 갑갑증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그걸 잘 풀면 전화위복이 되는 것이고, 그걸 잘 못 풀면 삶이 끝없이 추락할 수도 있다. 행운의 여신은 항상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 두자.

간디는 물론 그가 기차 안에서 겪은 엿같게 불쾌한 상황을 잘 풀어나갔기에 위대한 성인 반열에 이름을 올린 것이리라. 그에게 일어난 일은 당대 백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엘리트 변호사 간디에게는 참을수 없는 극도의 역겨움이었다.

아, 글쎄! 백인이 "쿨리(하인 신분)가 어떻게 1등칸에 앉아서 갈 수 있단 말인가"하고 언성을 높인 것이다. 간디는 이 무슨 개뼈따귀 같은 소리인가 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은 명색이 잘 나가는 청년 변호사인 것을! 하지만 백인의 눈에는 그저 검은 피부를 가진 천민에 불과했던 거였다.

간디는 굴욕적이게도 차장에 끌려 수하물 칸에 실려 목적지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간디는 소송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다음 역에 하차할까도 생각했지만, 다른 생각을 품었다.

'아니, 변호사인 나에게도 이렇게 천대하는데, 못 배우고 못 사는 남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제멋대로 일까! 내가 그 현장을 보고 바로잡아야겠어.'

간디의 굴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린 다음날 목적지로 가기 위해 승합마차에 올라타 또 한번 전날과 같은 인종차별을 겪었다. 검은 피부를 한 사람은 마차 안에 앉을 수 없고, 마부 옆에 앉아 가야 하다는 거였다. 

"별, 거지같은 규칙이 다 있군!"

간디는 두 사건으로 입술을 바르르 떨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아프리카 현지 사정은 간디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그곳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은 야간 통행금지 대상이었다. 인두세(*)를 내도록 강요받았다. 결혼식은 기독교 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효로 간주됐다. 그곳 인도인들은 온갖 인종차별과 모욕을 다 겪고 살아가고 있었다.

간디는 선언했다.
"제가 여러분들의 대변자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분들은 제게 와서 상의해 주십시오." 간디의 선언은 꾹꾹 눌러 이제 뛰어오를 일만 남은 용수철만큼 거세게 차별받던 인도인들에게 퍼져나갔다. 유능한 변호사였던 간디는 소송을 않고도 의뢰인을 대신해 유리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간디는 아프리카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제 아프리카 법정에서 동족을 위해 변호할 수 있게 됐다. 그는 그 일을 20년간 이어갔다. 그러는 한편 정부의 압제에 대항해 시민불복종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이를 '사티아그라하('진리에의 헌신' 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실천주의자들은 이를 '사티아그리히'라고 불렀다.

훗날 간디는 "사티아그리히는 감옥에 수감되거나 국외로 추방 당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난이나 위협도 신경 쓰지 않는다. 대의를 위한다면 절구에 찧어 곤죽이 되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8년간 지속됐다. 숱한 사람이 옥살이를 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간디는 물론 그의 가족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일단 지펴진 평등과 자유에의 목마름은 불타오르는 것이 시작이자 끝인 것만 같았다.

1913년 10월 간디와 6,000명의 노동자는 거리를 행진하며 인두세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마침내 정부는 1914년 인두세를 폐지하고, 인도 식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했다. 이제 간디는 고국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더 큰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였다.


1948년 암살되기 전까지 간디는 남은 생을 오로지 인도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가 죽은 뒤, 인도 국민들은 그를 '마하트마'라고 칭했다. '위.대.한.영.혼.'- 간디는 인도 국민들 마음 속에 위대한 영혼으로 남아 있다. 

우리들 중에는 무의식 중에 간디를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르며, 그것이 그의 풀네임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의 풀네임은 모한다스 간디(1869~1948)다.


(*)인두세人頭稅 : 납세 능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아니하고 각 개인에게 일률적으로 매기는 세금. 원시적 조세 형태의 하나로 18~19세기에 없앴으나, 현재 생활필수품에 대한 소비세 따위의 간접세는 이것과 같은 방식이다.<출처=네이버 국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