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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사회학.com/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추하중사秋下中蹝

걸어가고 있는데,
전방 11시 방향, 100미터도 넘는 거리에서
고소한 깨 냄새가 콧끝을 찔러왔다.
냄새의 진원지와 점점 거리가 좁혀지자 묘한 소리가 연방 들려왔다.
"아이고, 깨 죽네. 아이고, 간지러. 아이고, 깨 죽네, 아이고 간지러."
텅빈 직지사 주차장에 파란 천막을 바닥에 깔고
한 아주머니는 홍두깨를 들고 도로변 들깨밭에서 막 꺾어낸
깨를 툭툭 탁탁 두들겼다.
아주머니 손아귀에 들린 깨들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간지러. 아이고, 간지러."
또다른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깨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파란 천막에다가 
패대기를 쳐가며 깨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 깨들은 울먹이며 외쳤다.
"아이고, 깨 죽네. 아이고, 깨 죽어. 이 양반들 시방 왜 칸데여!

깨의 일생은 
가지 밑둥이 댕강 잘려나가기 전에 먼저 깻잎을 내어 주고,
깻잎을 내어 주고 나면 알알이 박힌 비립종 크기 만한 검정깨를 양껏 내어준다. 
검정깨를 내어 주고 나면 인간이 죽기 전에 장기를 기증하듯
비쩍 말라 앙상하디앙상한 몽뚱아리 일체를 고스란히 기증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인간은 깨를 짜 기름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깨를 믹서기에 갈아 미역국 육수 내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나는 깨를 털고 있는 현장과 마주섰다. 그 광경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깨 터는 사람들 말고, 패대기 쳐지고 안마 받고 있는 깨들을. 그리고 잠깐 동안 그들의 마지막을 애도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늘은 높았고, 청명했다. 그래도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날 가게 되어서. 죽게 되어서. 
/심보통 <추하중사秋下中蹝-가을 아래 걷던 중> 20131017

*깨는 참깨와 들깨를 통칭하는 말이다. 내가 본 깨는 들깨다. 들깨는 주로 국거리용에 사용하는 반면, 참깨는 짜서 비빔밥에 두어 방울 떨어뜨려 먹기도 하고, 볶아서 김밥의 고명으로 쓰기도 한다. 위키백과사전은 "(깨는) 고소한 맛과 향을 지니는데, 참깨는 맛이 적고 향이 강하며 들깨는 맛이 강하고 향이 적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참깨와 들깨는 전혀 다른 과의 식물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쌍둥이처럼 닮았다. 자연의 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