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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사회학.com/미디어 프리즘

[미디어窓] 신문을 대하는 방법


#신문을 대하는 방법(부제: 내 말 좀 들어)

정의(定義)는 사람을 묶어놓는 못된 구실을 할 때가 있다. 뉴스에 관해서도 그렇다. 우리는 신문기사 하나하나를 일러 뉴스(News)라고 한다. 뉴스의 정의는 새로운 소식이란 뜻이다. 때 지난 뉴스를 보는 것, 그러니까 구문舊聞을 보는 것은 바보 같다는 인식을 준다. 그래서 일까. 하루 지난 신문은 곧잘 쓰레기로 전락한다. 그걸 들고 열독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신문을 양산해 내는 신문기자에게는 '하루살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나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뉴스의 정의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신식정보 창고'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사람들은 신문을 일반 쓰레기와 같게 취급할까. 만날만날 중고생들의 교과서 1권 분량을 생산해 내는 일간 신문기자들의 노고가 하루, 아니 반나절이면 음식 덮개로, 농산물 깔개로 손쉽게 용도 변경되는데 무심히 보고만 있을까. 

요즘 한 달 지난 신문을 갖다 놓고, 하루치 분량을 읽어보면서 갖는 소회다. 사실 나는 고2 때부터 하루 지난 신문을 보았다. 아버지가 읽고 난 신문을 다음 날 학교로 가져가 읽었다. 대학논술 준비 차 담임선생이 시켜서 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인연이 나를 신문기자의 길로 이끈 단초였다. 신문기사 읽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고2 때 내가 읽은 기사란 기껏 가십거리 사건기사가 전부였다. 

그러다 고3이 되어 말랑말랑한 문화 기사 읽기로 확장됐고, 정치기사와 경제기사를 읽어내는 것은 한참 후에 가능했다. 첫째는 고교생의 관심 분야가 아니어서 힘들었고, 둘째는 한자어가 많아서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때 국어사전, 옥편 갖다 놓고 읽은 게 살아가면서 도움이 많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대학교 때도 내 가방에는 항상 신문이 있었다. 당시에는 조중동을 돌아가며 1달씩 구독했다. 쉬는 시간, 공강시간에 강의실이나 야외 벤치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으면 동기는 물론 선배들도 별나게 쳐다봤다. 그만큼 우리 대학생들은 신문읽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아마도 신문에는 대중지이자 권위지라는 이상 야릇한 이미지 때문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 적이 있다. 

기실 신문은 한국전쟁 동안 그리고 그 옛날 독립운동 하던 동안, 그리고 국가 대사에 대란이 있는 동안은 대중지로 통했다. 하지만 평시에 신문은 보는 사람이 따로 있는 종이매체 정도로 인식되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해가 다르게 절독률이 가파르게 상승할 리가 있겠는가. 흔히들 신문기자들이 사실을 왜곡 보도해 신문을 외면하는 독자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건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인터넷, 스마트폰 같은 대체재가 마련됨으로써 떠나는 독자가 많아졌다는 게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내가 즐겨보는 신문인 중앙일보에는 종이신문의 사양화를 유달리 애석하게 생각하는 기자가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이다. 이 분을 내가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이 분은 종이신문을 읽어야 한다는 칼럼을 여러 번 쓴 적이 있다. 

특히 중앙일보가 종합편성채널사업자로 선정 돼 Jtbc를 개국할 즈음에도 이 분은 신문사가 본업을 두고 방송의 길을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칼럼을 싣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지난달 26일 칼럼에 또 한번 종이신문을 읽자는 주장을 담은 칼럼을 썼다. 앞전에는 어느 교수의 말과 대기업의 면접관 말(?)을 빌려 종이신문을 읽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이 인간의 뇌에 미치는 영향을 심층 분석한 기사 내용과 여론조사기관 트렌드모니터의 조사결과를 인용해 종이신문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책읽기는 옵션으로 끼어 넣으면서 그가 펼친 주장은 스마트폰 읽기는 '픽셀(pixel) 읽기'고 종이신문 읽기는 '프린트(print) 읽기'이다. 

그는 픽셀 읽기는 건성으로 읽혀 사고력과 폭과 깊이가 프린트 읽기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칼럼에 따르면 트렌드모니터가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스마트폰 사용으로 가장 줄어든 활동은 독서(41.5%) 그 다음이 신문읽기(40.2%)였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프린트 읽기'를 '픽셀 읽기'의 해독제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나는 적극 찬성한다. 우리 국민들 중 상당수가 그의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쩌랴. 신문읽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수습기자 교육 때나 기사를 쓰다 보면 선배들로부터 몇 번이고 듣는 얘기가 있다. "기사는 중학교 2학년 수준으로 써야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선배기자들에게 되묻고 싶은 충동이 일곤했다. "중학교 2학년 수준으로 쓴 기사는 이런 식이에요?"라고.

"종이신문 읽어라는 내 말 좀 제발 들어라"고 하기 전에, 숱한 기자들은 자신이 쓴 기사를 들고 중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이 기사가 얼마나 이해가 되니?"하고 물어보았으면 좋겠다. 지방지 기자들은 더더구나 더 그런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그래도 배명복 논설위원 같은 분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종이신문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꿋꿋하게 하는 기자도 이제 몇 안 된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간다. '하루살이' 인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