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長話] 오늘, 따져 묻는다(심보통 1979~)
동학東學은 골치 아픈 것이 분명하지만 지적 호기심을 확장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동학을 좀 알겠다고 작심하고 자료를 들여다 보면 조선사까지 아니 미칠 수가 없다.
동학이 태동(1860)하게 된 요인과 우리네 생애주기로 따져 한세대(30년) 뒤부터 연이어 벌어진 동학사건(공주집회, 삼례집회, 광화문복합상소, 보은금구집회) 그리고 1894년의 민란(2004년 정부는 앞으로 이 사건을 '동학농민혁명'으로 기억하자고 정리했다.)까지 모두가 민초들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을(특히 당시 생활사에 천착해) 읽다 보면 우리가 가진 아니, 내가 가진 조선의 상식이 무척이나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예컨대 근본적으로 조선이 정말 유교국가였을까 하는 점이다. 518년 동안 거개가 신분질서가 엄연했던 조선에서 유교국가라는 말은 일부 지배층에서만 통용되고 이해되는 것 아니었을까.
실상 당시 민초들은 유교 질서에 지배는 받았다고 하지만, 일상은 그다지 유교적이지 않고, 다분히 토속신앙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일상사에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니, 나는 조상을 숭배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게 유교의 핵으로 알고, 민초들도 그런 삶을 영위했기 때문에 조선은 유교국가였다는 데 한치의 의문을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나는 최근 조선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선은 분명 소수의 유학자들이 다수의 백성을 지배한 것은 맞으나,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유학자들은 유학자들의 삶의 틀(유교에 기본한)에서, 백성들은 백성들의 삶의 틀(오랫동안 고수해온 토속신앙적인)에서 '그냥 살다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근본적으로 조선의 일반 백성 집에도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조상을 제대로 모신다는 상징은 누가 뭐래도 사당이었을 테니 이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면 일반 백성들의 조상숭배와 효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거야 쉽다. 백성들이 조상을 숭배하고, 부모를 섬기는 것은 토속신앙의 신념체계였다. 이 둘을 하지 않거나 잘못하면 하늘에서 벌을 내린다는 원초적 믿음은 유교와 무관하게 오래전부터 실존해왔던 것이다. 우리는 아니, 나는 이 점을 간과한 채 조선이 유교국가였다고 단정하는 우를 범해온 것이다.
내가 보기에 조선은 정확하게 말하면 유교 체제를 518년간 정착시키려는 위정자들과 토속신앙의 체제로도 만족하며 살아온 백성들이 공존한 국가였을 뿐이다. 뭐 이래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삶을 요리 깎고 저리 깎아 그럴 듯하게 조각해야 하는 게 정답은 아니니까 말이다.
각설하고, 동학이 부르는 지적 호기심의 팽창 가운데 하나는 유교다. 동학에서 말하는 유교는 뭘까. 나는 어느 순간 그게 궁금해졌다. 그래서 유교의 뿌리를 찾아 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에 오늘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글쓰기의 충동은 실은 여기서 시작됐다. 동학과 유교의 직접 관련성과는 다소 먼 이야기지만 그와는 별개로 주목할 만한 내용이라 기록해 두고자 한다.
물론 이 이야기의 시작은 '동학에서 말하는 유학이란 무엇인가' 그 실체를 찾아나서는 지적탐험이었다. 이 탐험 중에 동학의 음양오행론은 공자 맹자 순자(=공맹순)의 유교와는 무관하고, 후에 공맹순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덧붙인 <역전>과 <예기>에 음양론이 다뤄지고, 그것은 도가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굳이 공맹순에서 음양론의 근원을 찾자면 순자의 천(天)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그리고 구체적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참 뒤에 '옳다구나' 하고 무릎팍을 칠 대목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성위(性僞)'라는 단어 때문인데 내가 한참 뒤에 무릎팍을 치고, 신명이 올라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위(僞) 때문이었다. 우선 내가 읽은 텍스트를 보자.
---원시 유교에서 천 사상이 갖는 중요성에 비해 음양론이 차지하는 위치는 미소하다는 것이 흥미롭다. 음양이란 용어가 <논어>에는 전혀 쓰이지 않고 있으며, <맹자>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순자>에서 비로소 음양론이 유교 전통 안에서 수용되는데 순자는 "성위(性僞,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 곧 욕망에다가 예에 따른 위(僞), 곧 사려와 노력이 가미되어 아름다운 문화가 형성됨을 말함)"가 합해져서 인간사가 다스려지는 것을, 천지가 결합되어 만물이 생기고 음양이 교접하여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비교하였던 것이다.--<유교의 뿌리를 찾아서 p.403>
확인한 바와 같이 '음양론'은 차치하고 '음양'이란 단어 자체가 <공자>에도 <맹자>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동학에는 음양오행론을 깊숙이 다루고 있다. <순자>에서 음양을 다뤘다고는 하지만, 동학에서 음양오행론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감당이 불감당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발 물러나 도교에서 차용했다고 치고 넘어가자. 다만 순자의 말씀에만 주목해 보자.
"성위(性僞,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 곧 욕망에다가 예에 따른 위(僞), 곧 사려와 노력이 가미되어 아름다운 문화가 형성됨을 말함)"가 합해져서...
성위는 낯선 단어다. 인용자가 친절히 풀어놓았지만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순자의 언어이거나 잘 사용하지 않아 사양된 한자어인 듯싶다. 이번에는 이를 위(爲) 자에 사람 인(人) 변이 붙은 글자가 무슨 뜻인지 찾아봤다. 거짓 위僞) 자다. 멘붕이 왔다. 이게 뭐지? 성위가 어떻게 풀이말의 뜻이 될 수 있는 거지...
찬찬히 생각해 봤다. 풀이말로 미루어 성위라는 낱말은 보통 뜻이 아니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자어는 해당 한자의 뜻과 맞아 떨어져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해를 못하고 있거나, 한자가 잘못된 것이란 말이 된다. 오탈자가 없는 책의 성격상 한자가 잘못됐을 리 없고, 이렇게 중요한 낱말을 저자가 잘못 썼을 리 없을 것이다.
이럴 땐 역추적이 최상이다.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
욕망에다가 예에 따른 위(僞)
사려와 노력이 가미되어 아름다운 문화가 형성됨
풀이말과 문맥을 미루어 순자는 근본적으로 남녀의 사랑행위를 음양에 빗대었다. 그래서 섹스를 뜻하는 성(性)을 가져다 썼을 테다. 그러면 왜 거짓 위(僞)자를 썼을까.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는 순자의 표현대로 하면 '음양이 교접하여 변화가 일어나는 것' 즉 생명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다.
욕망에다가 예에 따른 위(僞)-라고 했는데, 일단 말이 멋있다. 욕망과 예를 상극에 놓지 않고 상생으로 놓았다. 그리고 거짓(?)이라고 했다.
옥편을 뒤졌다. 한자 한 자에는 여러 뜻이 있어서다. 물론 처음부터 여러 뜻을 훓긴 했다. 그래도 이해가 안갔다.
僞
1. 거짓 2. 사투리(=訛) 3. 잘못 4. 작위(作爲: 의식적으로 꾸며서 하는 행위) 5. 속이다
다시 찾아 보니 네 번째 뜻이 굵게 들어왔다.
욕망에다가 예에 따른 僞-는 뜻을 모르고 봐도 어딘가 역시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僞를 '거짓'이 아닌 '의식으로 꾸며서 하는 행위'라고 풀이한다면?
그거다. 섹스는 기본적으로 욕망이다. 그리고 '예에 따른'은 내가 보기에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유교적 풀이로 사랑을 나누는 행위자 쌍방의 현재 인격체(공자 식으로 말하면 얼마나 어진 인간인가)에 따라서이고, 다른 하나는 속된 풀이로 남녀 쌍방간의 사랑할 준비자세에 따라서이다. 전자가 자식에 대한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줄 자세에 방점이 찍혔다면, 후자는 얼마나 청결한 상태에서 상대를 맞이하느냐에 대한 쌍방간의 탐닉적 사랑에 방점이 찍혔다.(물론 이렇게 해서도 생명의 싹은 움튼다.)
정리하면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에다가 사랑할 자격을 여러모로 갖춘 인격체들의 의식적인 행위'가 욕망에다가 예에 따른 위(僞), 즉 음양의 합(合)이다.
이렇게 해서 내 의문은 풀렸다.
그런데 순자의 마지막 말은 도저히 모른 체할 순 없다. 그야말로 압권이다.
사려와 노력이 가미되어 아름다운 문화가 형성됨- 남녀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에 관한한 이만한 촌철살인이 또 있을까. 맞다. 사랑은 사려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그 결실(자식)을 보기 위해서는 단순히 음양의 합(合)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위가 합해져서 인간사가 다스려지는 것'은 남녀 간의 사랑 그 이상을 뜻한다. 부모는, 사랑하는 남녀는 아이를 낳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훌륭한 아이를 낳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본인 스스로가 도덕적인 인간인 상태여야 한다. 어진 인간인 상태여야 한다. 그래야 참 인간이 나온다. 그래야 부모와 아이가 합해지고, 그들 각자가 인간 세상에 도움되는 인격체가 된다. 그렇게 선순환해야 좋은 세상을 물려 줄 수 있다.
아, 나는 훌륭한 인격체인가. 나는 성위할 준비가 되었는가. 오늘, 따져 묻는다.
/심보통 201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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