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조선①] 경복궁 정원서 뽕나무가 재배되다
저는 요즘 조선의 일상사에 폭 빠져 있습니다. 우리네 선조와 왕실의 기록보다는 당시 우리나라에 장기간 머물거나 특정한 목적을 갖고 조선을 여행한 외국인이 어떻게 썼나에 집중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조선의 일상사를 문화적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서인데, 아시다시피 당시 구대륙 사람들의 문명이 조선보다 최소 100년 이상은 앞서 있었다는 게 오늘날의 평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당시 기록도 중요하지만 오늘의 우리의 시각으로 조선에 살면서 보았던 서구인의 기록도 진지하게 들여다 필요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사진=2015년 6월 6일자 한국일보
조선왕조 518년의 일상사를 들여다보는 건 여러모로 무리가 따르고 특정시기, 그러니까 근대(1876~1945)의 일상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물론 제 본업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도 해서 마음가짐이 다릅니다. 이 와중에 지난 6일자 한국일보에는 제 눈길을 잡아끄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사진만 보면 시골 출신인 제게는 그저 모내기하는 사진이었을 테지만 사진 제목을 보는 순간 구미가 확 당겼습니다. ‘창덕궁서 모내기 체험’- 이 사실만으로 많은 분들은 궁궐에서 웬 모내기(!)라고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거개의 현대인 머릿속에 조선 궁궐은 웅장하고 정갈하고 신성한 곳으로만 인식돼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 사진은 ‘조선 임금들은 그 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하기 위해 청의정 주변 논에 직접 모를 심고 가을에 수확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이 직접 모를 심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게 그 규모입니다. 사진은 모내기 체험 상황을 클로즈업 해 논의 규모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규모를 가늠하는 힌트는 ‘청의정’에 있습니다.
@사진=근로복지공단 대표블로그
청의정을 구글로 검색해 보면 조선의 임금이 얼마나 ‘귀여운 모내기’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청의정은 창덕궁 후원 옥류천 주변 정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정자<사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왕이 직접 심은 모는 매우 소박합니다. 요즘의 텃밭 정도 크기입니다.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궁궐 내에서 모심기가 연례행사로 치러졌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국왕이 직접 주도해서. 자, 이제쯤 우리가 가졌던 조선 궁궐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금 내려놓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직 이르다고요? 그렇다면 좀 더 강력한 걸 소개해 드리지요.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외국인의 조선 기록물 중 으뜸은『조선_1894년 여름』입니다. 이 책은 청과 일본 간 전운이 한창 고조될 무렵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조선을 들여다본 것입니다. 저자는 오스트리아 출신 헤세-바르텍이란 여행가인데 그 시선과 필력이 녹록지 않습니다. 그는 서울 산책 중에 아주 흥미로운 모습을 보고 담았습니다.
“나는 서울의 거리를 산책하다가 북서쪽 지역의 외국 공사관 건물 근처에서 활짝 열려 있는 엄청나게 큰 문을 만났는데, 문 안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뽕나무 재배지를 볼 수 있었다.”
헤세-바르텍이 본 것은 다름 아닌 ‘왕(고종황제)이 뽕나무를 경작하기 위해 쓰지 않고 방치해 폐허나 다름없는 한 궁궐의 정원’ 모습이었습니다.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이지만, 당시 기록을 찾아보니 고종황제는 1884년부터 1894년까지 창덕궁에 머물렀습니다. 헤세-바르텍은 북서쪽 지역의 외국 공사관 건물 근처의 궁궐에서 어린 뽕나무밭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궁은 경복궁이 됩니다. 헤세-바르텍에 의하면 당시 경복궁은 ‘폐허나 다름없는 한 궁궐’이었습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됐습니다. 270년 후 흥선대원군 때 중건됐습니다.
@사진= 네이버지도
그런데 가만 따져보니 시점이 뒤틀립니다. 경복궁 중건은 1865년 4월에 시작돼 2년 7개월 만인 1867년 11월에 대체로 끝났다고 알려졌습니다. 잔업까지 마무리된 게 1872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헤세-바르텍의 조선은 1894년의 조선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뒤편 경희궁을 잘못 비정한 게 아닌가도 합니다만, 고종은 창덕궁에 머물렀고 당시 조선은 안으로는 농민군의 반란으로 밖으로는 외세의 개입으로 다른 궁궐을 보존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경복궁 어느 정원에서 뽕나무밭을 경작했다는 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의 궁궐은 우리가 알고 있던 궁궐 그 밖의 여러 용도로 사용되면서 백성들과 가까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헤세-바르텍이 목도한 궁궐 내 뽕나무밭 풍경
정부가 추진하는 모든 사업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왕에게 보고된 것 중 왕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모든 일들은 대개 시작이 대단히 좋다.
현재 조선의 유일한 양잠 사업가는 왕이다. 여기에 관여된 관리들이 너무 많이 착복하여 이 일 역시 시작만하고 중단되는 사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왕은 뽕나무를 키울 경작지를 마련하기 위해, 쓰지 않고 방치해 폐허나 다름없는 한 궁궐의 커다란 정원을 내놓았다.
나는 서울의 거리를 산책하다가 북서쪽 지역의 외국 공사관 건물 근처에서 활짝 열려 있는 엄청나게 큰 문을 만났는데, 문 안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뽕나무 재배지를 볼 수 있었다.
어린 뽕나무들 사이에 인공적으로 파놓은 커다란 연못에서 조선 여인 몇이 거리낌 없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정원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져 있고, 제일 위쪽에 왕이 거처하던 육중한 전각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중앙에는 아름답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층 지붕을 가진 커다란 접견장이 있었는데, 새로 지어진 와궁의 접견장과 유사했다.
접견실의 엄청나게 큰 지붕을 굵은 기둥이 받치고 있었고, 그 사이에는 안쪽 면에 하얀 종이를 붙여놓은 문짝이 촘촘히 서 있었다. 이런 미닫이문 중 하나가 통째로 빠져 있어 이 열린 곳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곳은 누에고치가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들로 꽉 차 있었고, 온갖 오물로 뒤덮인 지저분한 바닥에서 조선인들이 쪼그리고 앉아 누에고치와 씨름하고 있었다. 한때 웅장했던 접견실은 완전히 황폐해져 있었다.(『조선_1894년 여름』pp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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