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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골 때리는 일

#골 때리는 일
본질은 숨어 있는 것이다. 현상은 드러난 것이다. 숨어 있는 것은 간파가 어렵다. 드러난 것 역시 실상은 간파가 어렵다. 보고 해석하기에 따라 다름을 무수히 양산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현실은 뻔히 아는 이론과 동떨어진 경우가 다반사다. 드러난 현상이 다름을 우리는 곧 틀림으로 단정하는 우를 범한다. 그래서 타자가 있는 일들에게 충돌과 번민은 공공연하다. 인간세상의 필연이다.
기껏 세상살이의 내공을 좀 쌓은 이 정도가 본질과 다름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뿐이다. 하나 이들에게도 한계는 있다. 바로 인간 본질의 다름을 인지한다고 해도 현상이 틀림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설득에 착수한다. 그건 틀린 거라고 설명해야 한다. 그것이 명명백백한 이해관계라면 해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일이라면 차분히 설득을 해야 한다.
그런데 설득은 대단히 어렵다. 상대가 틀림을 다름 해법으로 인지한 이상, 문제는 쉬이 풀리지 않는다. 이 경우 설득은 무용하다.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다.
나는 어제 집안 일을 처리하려고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와 선배를 만나고, 저녁답에 이해관계자를 만나 일을 처리했다.
이해관계자가 전날 틀림을 다름이라고 인지하는 것을 알고, 문자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다시 한 번 알아보라고 했지만, 알아본 것도 아전인수격이고, 종전의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서 결국 나는 폭발했다. 
"법대로 하시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툭하면 뱉기 일쑤가 된 법대로 하라는 말의 본질은 '그래 너랑 나랑 지리멸렬하게 끝까지 가보자'는 악다구니의 소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법대로 할 시간에 차라리 포기하고, 제 할 일에 충실하는 게 여러모로 낫다. 그렇지만 이건 내 일이 아니라 집안 일인고로, 맡았으니 충실히 끝까지 임무를 완수할 수밖에 없다.
이해관계자의 무대포 정신에 혀를 내둘렀지만, 내게는 내주어야 할 돈이 있었고 그에게는 받아가야 할 돈이 있었다. 미친 척, 모른 척 마지막 책무를 회피하려는 그에게 나는 '돈 못준다'는 마지막 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핵심은 간단하다. 전세기간이 만료돼 나가면서 원상복구를 하라는 데, 그걸 내가 왜 하느냐는 게 상대의 입장이었다. 그에게도 논리는 있었다. 10년 전 권리금을 주고 이 가게에 들어와 권리금도 못 찾고 나가서 억울한데 내가 왜 원상복구까지 하느냐다. 이쯤되면 감정적 대처로 보이지만, 그가 가진 원상복구 개념은 딴나라 개념을 갖고 있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원상복구라 함은 이 상태가 10년 전 원상이란다!
틀렸다. 설명을 해주었다. 10년 전 그대가 우리 상가와 계약할 때, 전 세입자와 권리금을 주고 받은 사실은 임대인인 우리 주인의 배려였다. 우리가 배려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권리금보다 더 많은 돈을 들이고 가게를 세팅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권리금을 지불해 지금 이 가재기 인테리어 등을 전 세입자에게 산 것이다. 이 가계의 물건은 그러니깐 모두 당신 것이다. 당신 물건을 싹 빼가라는 데 그게 왜 억울하냐. 아파트 전세집에 살다가 전세가 완료되면 어떻게 하냐. 제 물건 제가 가져 가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그대는 지난 1년간 권리금 행사를 하겠다고 버티고 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권리금을 포기하고 나가는 것 아니냐. 권리금을 포기했다는 것과 이 집기를 포기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포기했다고 그대로 두고 간다? 그건 당신네 재산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으니 이 가게에 버리고 가겠다는 거다. 우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다. 
그는 아마도 진작에 내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돈 덜드는 방안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백치미일 수가 없다. 그는 스스로 원리원칙주의자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대단히 지능이 떨어지는 미숙아로 보였다.
낮에 만난 선배가 일장 연설이 길어지더니, 저녁에 다시 보자고 했다. 이미 낮술로 취기가 오를 때로 올랐을 선배가 1시간 뒤 역시나 꼴라꼴라 됐다.
고향인 작은 지역에서 술 자리를 한다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뉘 집 아들이라는 게 금방 발각될 게 뻔해서다. 선배는 기자답게(?) 곤조가 있었다. 좌중한 6인 모두들 떨어져 나가고, 나와 선배와 선배의 사촌형님만이 남았다. 
그는 낮에 지역기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녹록치 않은 일인지, 괴로운 일인지를, 비루한 일인지 내게 웃프게(웃기게, 슬프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가 쌍욕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그렇게 사는 게 괴로운 현실, 그런 것들이 뒤범벅이 돼 인적드문 관광지 직지사 상가의 카페 <샤갈>은 천천히 굴러갔다. 여우비가 내리는 동안.
목소리 큰놈이 장땡이란 말도 있고, 아무리 화가 나도 성질내면 진다는 말도 있다. 선배가 살아가는 방식은 어느 날 뚝 하고 가슴에 꽂혀 들어온 게 아니다. 그건 노하우일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기자 노릇하는. 그 노릇을 못하면 밥벌이를 할 수 없다.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겠다. 인지를 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러지 못하고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테다. 오랜만에 고향의 선배님들과 거나한 폭탄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 
나는 저녁답에 내가 하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은 지은 그 세입자의 쓴웃음이 떠올랐다. 선배였다면 그 쓴웃음을 그냥 넘기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나도 성질이 없어서는 아닌데, 내 마음 속에는 공맹순의 말씀이 오락가락한다. 그래서 욱한 것이 내가 모자란 탓이다 싶어 그렇게 폭탄을 마셨는데도,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아, 골 때린다. 산다는 게 골 때리는 일이겠지만, 살아보니 정의의 사도는 오래가지 못하고, 영민한 놈은 골 때리는 일을 요리조리 잘 피하고 다니더라. 내 정신을 잃고 싶지는 않지만, 내 화를 다스리는 데 더 골몰해야겠다 싶다.
나에게도 인간의 본질은 다름- 그건 오케이! 
현상이 틀렸어도 다름으로- 그것도 오케이!-
하는 날이 올랑가 모르겠다. 
누님이 밥 먹으란다. 밥은 먹어야지. 암, 먹어야 살지. 살아야 올랑가 말랑가를 알 수 있지. 
/2015.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