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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옛‬ 인연을 되찾다



‪#‎옛‬ 인연을 되찾다
나는 색연필을 깎다가 다소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 색연필들은 아내가 학창시절 사용하던 것으로 아마도 회사에 입사한 뒤로 방치돼 온 것들이리라. 결혼하고 아내의 생필품을 휘저어 보다 쓸만한 물건을 따로 빼놓았는데, 그 가운데 이 형형색색의 색연필도 끼어있었다. 아내의 옛물건 중 내가 다시 사용할만한 것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수첩이며, 무지개색깔의 형광펜과 다양한 볼펜들 그리고 색연필은 '앗싸라비아 득템'이었다.


이제 누구의 것이란 게 별 의미가 없어진 이 물건들은 죄다 아내가 대학시절 사용하던 것들이다. 이제 내 물건으로 서랍에 보관돼 있는 것은 아직도 많다. 풍요의 시대임을 나는 새삼 깨닫는다. 오늘은 우연히 내 것이 된 아내의 필통을 열어봤더니, 뭉퉁한 색연필 3개가 쫄로리 잠자고 있었다. 나는 요놈들을 깨워 쓸만하게 만들었다. 깎으면서 참 요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색연필들의 역사는 아내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나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연필들과 아내가 인연을 맺었을 당시, 나와도 전혀 인연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내와 나는 같은 시기 대학을 다녔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약 6km가량 떨어진 곳에서 아내는 학교를 다녔다. 아마 이 연필들의 상태를 보아 아내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4년 때가 아닌가 한다. 아내가 4학년 졸업반 일 때, 나는 군대를 전역한 복학생이었다.


아내는 사회학도였고, 나는 언어학도였다. 대학생활이 빤하던 그 시절, 아내는 우리 학교로 놀러왔을 것이다. 나도 아내 학교를 자주 들락거렸다. 아마 지나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인지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훨씬 뒤의 일이지만 말이다.


이 색연필은 아내를 회사로 이끈 일등공신일 것이다. 열심히 밑줄 그은 보람으로 지금의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그런 아내의 옛물건이 이제 내 수중에서 열심히 놀아나고 있다. 어쩌면 아내의 옛물건들은 아내와 나 두 사람 인연의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혼하고부터 아내의 옛물건을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물건들은 아내의 20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사실 하나는, 아내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성인의 99%는 옛물건을 이렇게 방치해 둔다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때 쓰레기로 간주하고 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 모든 옛물건에는 소중한 누군가의 체취가 묻어있음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옛물건의 역사가 그만의 역사가 아닌 나의 역사로, 그만의 인연이 아닌 어쩌면 나와 더 깊은 인연이었음을 알게 될테니까.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개별국가의 역사는 서로 연계돼 있다"고 했는데, 개개인의 인생역정이야말로 서로 연계돼 있음을 우리는 알고 살아가야 겠다. 
/2015.6.2 심보통, 색연필을 깎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