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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동학 전쟁, 역사 전쟁

심지훈(37)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지난 17일 경주 더 케이호텔 거문고A홀에서 열린 2015 동학 인문학 특강에서 '경북대구의 동학이야기'를 주제로 대구경북 시도민 200여명과 만났다.



#동학 전쟁, 역사 전쟁
불쾌하기 짝이 없다. 본의 아니게 '동학 전쟁'의 틈바구니에 끼게 되었다. 동학 전쟁은 역사 전쟁이다. 한국사 국정교과서 논란이 연상된다. 골치 아프다.


나는 최근 400페이지 분량의 동학 집필을 끝마쳤다. 제목은 '서른일곱 스토리텔러가 쓴 우리 동학(이하 우리 동학)'. 비교적 짧은 시간에 두 팔목이 부스러지도록, 코 아래 열꽃이 필 정도로 사력을 다해 치열하게 썼다. 

'대중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동학 교양서'를 목표로 전방위로 동학 성과물들을 검토했다. 동학(동학농민혁명 포함)은 단일 주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분야다. 

섣불리 쓸 수 없었다. 여러 분들의 생각을 읽어보고, 나만의 관점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검토해 보니, 파편적이고 목표지향적이고 소재중심적인 경향이 뚜렷했다.

파편적이라는 것은 동학이 민중의 역사이면서 '아작난 역사'이기에 변변한 자료가 전해 오지 않아 생겨난 현상이다.

목표지향적이라는 것은 동학, 특히 동학농민혁명을 우리나라 근대의 기원으로 보는, 해서 웬만하면 전근대적인 텍스트도 근대적인 콘텍스트로 읽어내려고 하는 경향에서 포착한 현상이다.

소재중심주의라는 것은 1894년 당시 동학농민군이 주도한 전쟁 양상을 뒤늦게 발견된 기록(주로 사대부가 남긴 기록)을 갖고 추적해 들어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최근의 연구 경향은 경상도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전개 양상이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동학의 기억을 이끌어온 세력은 천도교다. 동학농민혁명의 기억을 이끌고 있는 세력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하 기념재단)이다.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이다. 1905년 3대 교주 손병희가 '하늘의 올바른 도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천도교로 개명했다. 기념재단은 2004년 정부가 출연해 만든 특수법인이다. 

천도교와 기념재단은 견제와 제재, 협력하면서 10년 동안 불편한 동거를 해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념재단은 근본적으로 천도교의 협조가 없이는 일을 추진해 나가기 어렵다. 빈약하나마 동학 자료는 천도교가 거의 소장하고 있고, 천도교가 실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천도교는 공적자금이 지원되는 기념재단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기왕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해야 한다면, 천도교도 협조할 수밖에 없다. 다만 기념재단이 그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동학농민혁명을 따라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경상북도가 가세했다. 동학의 발상지는 경북 경주다. 그동안 동학발상지 고장 경상북도가 동학을 다룰 때 많이 소외됐었다는 것은 학계의 일반론이기도 하다. 하나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하는 대목에서 천도교, 기념재단, 경상북도가 동상삼몽을 꾸고 있다. 

천도교는 기념재단을 대할 때처럼 경상북도의 일에도 일정 부분 관여하려 한다. 경상북도가 하는 일에 견제하고 제재하려는 조치는 몇 번 이루어졌다. 천도교의 견제와 제재 조치는 그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동학과 경상북도가 기억하고자 하는 동학이 다를 때에 이루어졌다.

동학에서 경상북도가 갖는 위치는 특이하고, 특별하다. 경상북도는 공히 동학의 발상지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경주 용담정에서 만들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1894년 신분철폐 폐정개혁 척왜양을 기치로 거국적인 농민군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 정신적 토양은 동학이었다. 대체로 수긍되는 사실이다. 


이 두 사건에서 경상북도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다 우리 국민들이 잘 모르는 동학 사건 두 개가 경상북도에는 더 있다. 1871년 영해동학농민혁명과 1915년 상주 은척면 우기리에 자리 잡은 상주 동학당이다. 경상북도는 상주 동학당을 동학의 주요 기억으로 소환하려고 한다. 잊혀진 동학 역사, 100년 동안 교당이 건재하고, 1,400여점의 유물이 보전된 곳.


천도교는 반대한다. 상주 동학당은 동학이 아니라고 본다. 동학농민혁명과도 무관하다 본다. 정말 그럴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사료가 상주 동학당을 동학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1871년 영해혁명은 천도교 일부에서는 무시하고, 일부는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나는 두 사건 모두를 '경북의 동학'이라고 파악했다. '우리 동학'에서도 그렇게 전개했다. 

하나 전체 동학사에서 두 사건을 클로즈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경북 동학에 4개의 변곡점을 두었다. 1860년 동학 탄생, 1871년 영해혁명,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5년 상주 동학당. 전체 동학사에서 네 사건들은 근본적으로 자료의 빈약함 때문에 고르게 서술될 수 없었다. 기존에 어느 정도 체계화된 사건(1860년과 1894년 사건)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천도교 관계자는 내게 원고를 교정해 줄 것을 권고(?)해 왔다.
'꼭 바로잡아 줄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역사를 하나의 관점으로 묶으려는 좋지 않은 시도다. 

내가 '우리 동학'을 한창 집필 중일 때, 국정교과서 문제가 터졌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역사라는 것은 국정이다 검정이다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느 것으로든 역사를 배웠으면, 그 '배웠음' 뜻은 '이제 다른 관점도 파악해 볼 기본 소양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국정교과서 문제나 내가 쓴 '우리 동학' 문제나 핵심 포인트는 '역사를 배우는 것'이고,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다른 관점을 파악할 소양을 갖추'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김아무개의 동학사도, 박아무개의 동학사도 그 어떤 누구의 동학사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니까 말이다. 나는 이쯤에서 학습할 자유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관점을 읽어 볼 자유 말이다.

동학사는 이미 특별한 관점이 상식화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교양 수준의 다른 관점은 하등 문제 될 게 없다. 그것을 통해 역사의 새 물꼬를 기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 역사는 고정의 역사가 아니라 부침의 역사였다. 역사는 근본적으로 인간사다. 인간사는 인간이 만들어 간 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일이다.

경상북도가 하는 일을 나는 지지한다. 천도교가 하는 일도 나는 지지한다. 기념재단의 일도 지지한다. 다들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소신을 갖고 글을 쓰는 작가일 뿐이다. 만약 내 글에 비판이 가해진다면,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논의할 것은 논의하고, 토론할 것은 토론할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애 다루듯 요곤 요렇게 하고, 조곤 조렇게 해야 한다는 교조적 가르침을 나는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나는 그런 식의 행동양식을 단호히 거부한다. 나는 내 양심을 믿는다.
/2015.11.7 심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