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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인간 유형 네 가지

칼럼 : 인간 유형 네 가지


*첫 번째 유형: 제멋대로 사는 인간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세상에 내놓은 건 1948년이었다. 정확히는 단재 선생이 완고를 출간한 것이 아니라 유고집 비슷하게 후학들에 의해 출간되었다. 한 권의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 일부는 조선일보에 먼저 선을 보였다. 그게 1931년, 일제강점기 때였다. 단재 선생이 이 글을 쓴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나라 잃은 국민들에게 민족 자주성과 정체성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단재 선생은 뛰어난 사상가였다고 하지만, 요즘으로 치면 뛰어난 이야기꾼에 더 가까웠다. 무엇보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서설에서 역사란 이런 것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은 팍팍 꽂힌다. 한 번 보자.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나我'와 '저들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이다. 세계사는 세계 인류의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고, 조선사는 조선민족의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나'에 대한 '저들의' 접촉이 번잡할수록 저들에 대한 나의 분투는 더욱 맹렬해져 인류사회의 활동은 멈출 틈이 없고 역사는 끝날 날 없이 계속된다. 그러므로 역사는 '나'와 '저들'의 투쟁의 기록이다. 
'나'나 나와 상대되는 '저들'의 나도 역사적 '나'가 되려면 반드시 두 개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1.상속성이다. 시간적으로 생명이 끊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2.보편성이다. 공간적으로 영향력이 파급되는 것을 말한다.
... 역사는 시간적으로 계속되고 공간적으로 발전해온 사회활동상태의 기록이기 때문에 시기, 장소, 사람 이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삼대 원소이다."
<<조선상고사 pp.30~35>> 
 
단재의 역사관은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어렵지 않게 역사의 본질을 송곳으로 찍어 눌러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갈파한다. 
 
"안정복이 <<동서강목>>을 짓다가 빈번한 내란과 외구의 출몰이 동국의 고대사를 남김없이 파괴해 버렸다고 분개하여 슬퍼하며 탄식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조선사는 외구의 병화 때문이기 보다, 조선사를 저작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욱 많이 파괴되고 버려진 것 같다" <<위 책>> p.35
 
단재의 안목은 눈물겹도록 정확하다. 맞다. 우리 인간세상에는 이런 유형들이 고대로부터 존재해 왔다. 이런 유형의 전형적인 특징은 대개 남들이 살면서 배우는 굽히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기본양식을 배울 필요가 없는 환경에 자라 성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이 사회고위층이 되면 세상을 제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할 뿐더러, 제가 잘나서 지금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며 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두 번째 인간: 목표를 세우고 사는 인간
 우리 사회는 어쨌든 다방면으로 진화했다. 이를 전제로 출발한다면, 제멋대로 사는 인간에 대항해 목표를 세우고 사는 인간이 등장했다. 그 목표는 지극히도 못 살았던 우리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출세였다. 출세의 첩경은 공부였다. 우리 국민들은 잘 살아도 공부를 했고, 못 살아도 공부를 했다. 그런 결과로 대학진학률은 전 세계 최고수준이다. 
 그런데 목표를 세우고 사는 인간은 특정기점을 시작으로  분화한다. 공부가 여전히 출세를 보장하는 루트이긴 하지만, 그보다 좀더 쉽고 본능적인 방법이 생겨난 것이다. 정신이 중시되는 세상이 가고, 물질이 중시되는 근대의 문이 열리자, 너도나도 돈을 벌겠다고 나섰다. 돈 많이 벌기가 목표가 된 인간들은 공부를 위해 출세를 하려는 인간들보다 방법이 더 다양해져 신명이 났다. 
 우리나라는 1876년 개항하면서 자본의 맛을 봤지만, 수저를 떠 자본 맛을 제대로 한 번 맛보려는 찰나에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었다. 해방 후에는 남북이 하나로 쪼개져 한국전쟁을 거쳤다. 폐허가 된 나라를 무지한 국민들이 두 주먹으로 일으켜 세우면서 목표를 세우고 사는 인간이 수면으로 가라앉았지만, 그때도 가슴에 칼을 품고 나름의 꿈을 펼칠 날을 기대하면서 산 국민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19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도 우리 국민은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고, 이전 시대와 마친가지로 눈만 뜨면 입에 풀칠 할 궁리부터 해야 했다. 전근대니, 근대를 개항을 기점으로 우리는 편의상 나누지만, 거개의 국민들은 여전히 전근대의 틀 안에서 허우적 댔다. 
 우리 국민 상당수가 이제 좀 먹고 살만하다고 느낀 때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였다. 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르고 나자 월급쟁이 봉급이 전에 같지 않게 엄청나게 뛴 것이다. 유사 이래 서민경제가 이렇게 활기찬 시절은 채 10년이 가지 않았다. 선배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1996년이 피크였고, 곧 외환위기로 삭풍이 불었다. 그때만 해도 순진했던 우리 부모들은 나라 망한다고 장롱 속에 꽁꽁 숨겨뒀던 결혼반지며, 아이들 돌반지며 금덩이란 금덩이는 나라 살린다고 다들 국가에 헌납했다. 그렇게 모인 금덩어리가 얼마인데, 일단 국가 수중으로 들어간 뒤, 그 돈의 사용처를 밝히는 정부 관료를 나는 여태 보지 못했다. 국민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테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이를 악물고 돈독 옮은 환자마냥 돈돈돈했던 계기는 다름 아닌 1995년 전두환, 노태우 전직 두 대통령의 천문학적인 비자금이 만천하에 공개된 이후였다. 이를 계기로 소시민들조차 '1억쯤'을 뉘집 강아지 이름처럼 여기기 시작했고, 돈 많이 버는 것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목표지상주의는 인간다움을 무시한 결과, 오늘날 돈이면 장땡이인 어마무시한 세상을 만들어냈고, 초유의 무질서한 사회를 너 나 할 것 없이 겪고 있다. 이런 중에 목표지상주의는 결과맹목주의와 뒤엉켜, 좋은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간에 쓸개까지 빼줄 듯한 아부와 협잡이 전횡하는 사회를 낳았다.  
 
*세 번째 유형: 원리원칙을 갖고 사는 사람
 하나 우리 사회에는 드물게나마 원리원칙을 갖고 사는 사람이 있다. 자칫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사는 사람과 헷갈릴 수도 있는데, 근본적인 차이점은 성과에 따른 보상과 무관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원리원칙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강한 내성(=내공)을 기반으로 한다. 내성이란 쉽게 굴하지 않는 품성, 다방면으로 많이 아는 지성, 옳고그름을 가릴 줄 아는 통찰을 두루 겸비한 사람이다. 위기를 유하게 넘는 사람이다.
 원리원칙을 갖고 사는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제 자리에서 내공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윗자리보다는 '그 자리'를 선호한다. 목표를 세우고 사는 사람의 목표가 자기편의주의에 기반한 것이라면, 원리원칙을 갖고 사는 사람의 목표는 인류애를 토대로 한다. 이런 유형은 사회에서 대개 투박하고, 무례하고, 별나다는 평가를 곧잘 받는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원리원칙을 갖고 사는 사람이 별종처럼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리원칙을 갖고 사는 사람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과 목표를 세우고 사는 사람, 심지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보다 결과적으로 양적 질적으로 더 풍요로운 삶을 산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에서 지향할 것인지 지양할 것인지는 개개인이 판단 해야할 몫으로 보아야 한다.  
 
*네 번째 유형: 생각 없이 사는 사람
 이 유형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끝!
/2015.9.24 심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