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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그리움, 사무침

‪#‎그리움‬, 사무침
살다 보면 지난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립다는 생각을 넘어 사무치다는 감정이 온몸을 몸서리치게 휘감아칠 때가 있다.
어제 회사에서 회사에 맞는 적화된 프로그램을 새로 깔면서 문서며, 사진을 새로 정리해야 했다. 그러다 이 사진이 눈에 밟혔다.
이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사진 한 장이 내 가슴을 후벼팠다. 개인적으로 그리움, 사무침, 환희, 슬픔의 감정들이 한데 뭉개어진 사진이다.





2013년 1월 16일, 서울 목동의 어느 카페에서 찍은 것이다. 형님이 운영하는 영어학원 앞의 카페다. 나는 2012년 1월부터 2013년 1월 19일까지 형님에게 더부살이를 했다. 서울서 철수할 때가 서른넷이었다. 어느새 3년이 흘렀다. 그 사이 크고 작은 일이 있었다.
형님이 그해 1월 20일(대한) 결혼했고(한창 연애 중이었던 형과 형수에게 아직도 미안할 따름이다), 같은 해 10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가난한 작가의 신분(실은 백수)으로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다. 나는 그해 11월 대구한국일보(구 한국일보 대구본부)와 일하기로 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1년 만에 백수 때 만난 한 여인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러니까 이 사진은 내가 서울에서 철수하기 3일 전의 사진이다. 2012년 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는 내 짧은 생에 희노애락의 절정기였다.
2010년 12월 19일 신문사를 박차고 나와, 2011년 1년간 무기력증을 앓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번아웃증후군 증세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 1년 동안 아버지는 나를 이끌고 직지사, 황악산 그리고 아버지 고향마을과 동네 곳곳을 걷고 또 걸으며 숱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셨다. 아버지 살아온 이야기, 동네가 지금까지 흘러온 이야기, 세상살이에 대한 이야기 등등.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그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내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건 아버지와 동네 유랑을 시작한 지 1년이 될 쯤이었다. 
나는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내 남은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서울에는 형이 있었다. 대학 갓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바로 시작했던 난, 형에게 기대야 한다는 걸 적이 부끄럽고 염치없다 여겼지만, 형을 믿었기에 거두절미하고 1년만 붙어살게 해달라고 했다. 형은 두말 않고, 동생의 청을 들어주었다. 
나는 비로소 전업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다. 내가 만나고 싶은 선배들을 만났고, 그 선배들을 통해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글만 써서 먹고 산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그때 몸소 알았다. 월 100만원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구구하게 알았다. 
하나 나는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들에 대해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고맙고, 아름답게 여길 수 있었던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생각한다. 
그 1년의 일들로 나는 기존의 내 사고체계를 많이 허물고, 다시 쌓아올렸다. 만물을 동경하는 마음과 눈을 새로 얻게 되었다. 그래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내 셀프 시작(詩作)수업은 올해로 4년째다. 
수천 장의 사진 중 비수처럼 꽂힌 2013년 1월 16일의 이 사진은 오늘 내게 또 하나 이야기를 남기라고 한다. 그것이 졸작이든, 수작이든 네 나이의 작가라면 무진장 열심히 쓰고 볼 일이라고 속삭인다. 
나는 서울 간 지 5개월 만인 2013년 5월 21일 내 밥벌이의 원천인 <스토리가 돈이다Storytelling is money>를 펴냈다. 책 제목은 정치평론가 황태순 선배님이 정해주었다.
그해 12월, 영남대 박정희리더십연구원의 채영택 박사님의 주선으로 <세상을 바꾼 43일-새마을운동발상지 신도마을이야기>를 집필했다. 채 박사님은 젊은 내게 '밀알을 하나 던지겠다'고 했다. 그 밀알은 동명의 영문본, 카툰 한영버전, 스토리기반 성인, 청소년용 한영팸플릿 등으로 확장 중에 있다. 채 박사님은 스토리텔링 작가인 내게 씨를 던져주었지만, 나는 연구원에 새마을운동발상지 싹을 틔워주었다. 그걸 열심히 돌보고 가꾸는 건 영남대 새마을연구센터다.
나는 지금, 불과 3년 전과 비교하면 더없이 복된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밤새워 내 글을 쓰고, 눈물겨운 고료를 받을 때 보다는 확실히 성취도나 행복감이 떨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회사는 이윤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회사원인 나는 그 기대에 충족을 시켜줘야 할 책임이 있다. 작가로서 할 일과 회사원으로서 할 일은 다를 수밖에 없고, 실무책임자로서 할 일과, 대표가 원하는 일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이에 덧붙여 혼자일 때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과 둘일 때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고, 월급의 사용처 역시 혼자 일 때가 다르고, 둘일 때가 다를 수밖에 없다. 
상대할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가 포기하고, 양보할 일도 덩달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때 작가 정신을 어디까지 고수해야 할지, 남편 정신을 어디까지 발휘해야 할지 대략난감할 때가 여간 고민거리가 아니다.
이런 걱정 저런 걱정 내려놓고 글만 쓸 수 있다면 오죽 좋으련만, 에너지가 여러 곳으로 분산되니 글 쓰는 즐거움도 예전만 못하고, 글비도 여간해선 내려주지 않는다. 이러니 20대 오로지 열정 하나로 밤새워가며 썼던 <박정희, 이병철 이야기>가 최근에 썼던 <동학 시리즈>보다 훨씬 낫다고 여겨진다. 
글을 쓴다는 건 기본적으로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한다. 글쟁이가 글 쓰는 일 외에 다른 곳에 신경을 팔면 그 결과는 십중팔구 시원찮기 마련이다. 2012년의 즐거운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커피숍의 커피향이 예까지 날아든다.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 낱말 하나하나가 알알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그 시절이, 참 그리웁다.
/심보통2016.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