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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떡가래



#떡가래

설 대목이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분주하다. 수레를 끌고 방앗간으로 가셨다. 나는 어머니를 뒤따라갔다. 오랜만에 시골에 생기가 돈다. 방앗간 큰 출입문은 하얀 김으로 서려 있다. 방앗간 안에는 할아버지 두 분, 할머니 두 분(아, 울 오마니도 이제 할머니다!)이 계셨다.

떡가래가 인사했다.

"안녕. 어서와."

떡가래가 자기소개를 했다.

"난 가래라고 해. 오랜만에 젊은 총각이 행차하시었네. 반가워."

떡가래가 자신의 탄생과정을 설명하려 들었다.

"잘 봐둬.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금부터 설명해 줄게."

떡가래를 빼려면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깨끗하게 씻은 쌀을 12시간 동안 물에 불려야 한다. 어머니는 불린 쌀 닷 되를 수레에 싣고 방앗간으로 가셨다.

"어머니가 가져온 쌀을 우선 곱게 빻아."

방앗간집 작은아들이 쌀을 빻는 기계에 쏟아 부었다. 방망이로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리고 기계를 작동시켰다. 기계는 탈탈거렸고 곧 거짓말처럼 하얀 가루가 함박눈 내린 날 야트막한 야산에 올라 비료포대를 타고 내려오듯 은색철판을 지나 빨간 고무다라이(국어사전은 대야, 함지, 지박으로 순화해 쓸 것은 권장하지만, 빨간 고무다라이를 대체할 용어를 나는 찾지 못했다.)로 낙하했다. 그건 마치 봄날 절정에 달했던 벚꽃 잎이 겁나게 지기 시작한 것 같기도 했다.

쌀 닷 되는 금세 백색가루가 됐다.

떡가래가 말했다.

"이걸 또 한 번 부드럽게 빻아줘."

방앗간집 작은아들은 빨간 고무다라이에 담긴 쌀가루를 다시 기계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기계를 '탁' 작동시켰다. 그러자 또 '탈탈음'이 났다. 또 한 번 쌀가루의 신나는 낙하가 시작됐다. 벚꽃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아 그 모습이 곱고도 고왔다.

"이제 찜통에 담아 40분간 쪄야 해."

방앗간집 작은아들은 쌀을 빻을 때 빨간 고무다라이에 손을 넣고 이리저리 저어주며 간간이 물을 부어 섞어주었다.

할아버지 두 분과 할머니 두 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이 과정을 나와 함께 지켜보았다.

40분쯤 경과하자 떡가래가 침묵을 깼다.

"자. 이제 아, 기다리시고, 고, 고대하시던 시간이 왔습니다."

방앗간집 아주머니는 평평한 틀 위에 찐쌀을 뒤집어 쏟아 부었다. 찜통에서 '퉁' 네모란 쌀 덩어리가 떨어져 나왔다. 마치 백설기 같았다. 아주머니는 곧 방망이로 이리저리 쌀 덩어리를 푹푹 찔러 떼어내고 짓이겼다. 이내 '틱' 기계를 작동시켰다. 이리저리 뭉개진 쌀 덩어리는 곧 물이 담긴 빨간 고무다라이로 투하되기 시작했다. 비로소 떡가래가 얼굴을 드러냈다. 그건 마치 흰 순대가 있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를 연상케 했다.

"이게 끝이 아니죠. 한 번 더!"

방앗간집 아주머니는 혼자 도는 기계를 끈 채 떡가래를 찬물에 이리저리 '마사지'시키더니 다시 틀 위에 얹었다. 다시 '틱' 기계를 작동시켜 떡가래를 빼냈다.

"이제 마무리!"

방앗간집 아주머니는 세로보다 가로가 세 배쯤 긴 플라스틱 통에 떡가래 두 가닥씩을 가지런히 놓은 뒤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가며 채워 넣었다.

"마지막 비닐 덮기!"

방앗간집 아주머니는 가지런히 놓인 위로 깨끗하게 씻은 투명 비닐을 덮어주었다. 아직 온기를 품은 떡가래의 숨소리는 투명 비닐을 짙게 만들었다.

그렇다. 한낱 떡가래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12시간 물에 불리기, 두 번의 빻기, 40분간 찌기, 두 번의 빼기와 찬물에 헹구기 등을 거쳐야 나온다.

그뿐이랴. 떡가래의 용도는 실로 다양하다. 하루 말린 뒤 빗겨 쓸어 이틀 간 서늘한 곳에 말리면 떡국 재료(가래떡)가 된다. 예로부터 우리 어른들은 설날에는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먹거리가 변변찮았던 시절에는 간장에 찍어 그냥 먹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다. 없어서 못 먹었지 기실 먹었다면 더 없이 훌륭한 영양식이었다. 연탄불에 구워 먹으면 쫀득쫀득 쫀드기 다름 아니었고, 고추장 설탕 파 양배추에 버무리면 떡볶이가 된다. 겨우내 먹다 남긴 떡은 옥수수, 쌀 등과 함께 뻥 튀겨서 뻥과자(?)로 먹었다. 아, 혹 어머니께서 긴 떡가래 서너 개를 썰지 않고 말려 두면 그대로가 칼이기도 하다. 딱딱하게 굳은 떡가래를 쥐고 벌이는 한판 떡가래 칼싸움은 겨울철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아, 떡가래가 눈물겹게 고마운 날이다. 이제야 이런 글을 쓰다니.

/작가 심보통 2014.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