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후편)- 철학을 세워야 건강한 사회 된다
내가 어제 쓴 글 <시선>은 사실 사회 통념에 관한 문제이다. 통념이 문제라고 했으니, 보는 이들의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통념은 보편적으로 '그러하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로 고착화된 생각이다. 쉽게 말해 '남들도 다 그러고 산다' 한 마디면 정리될 말이다. 이 말 속에는 '그러니 너무 유별나게 너 혼자 성인군자처럼 굴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 내가 따랐던 선배님도 그랬었다. "지훈아, 남들 다 그렇게 돈 벌고 산다." 나는 그 말에 실망을 느꼈고, 그게 사직서를 낸 계기 중 하나가 됐다.
통념은 대중의 버팀목이긴 하다. 통념을 뒤흔들면 대중이 설 자리가 없다. 예로부터 위정자들은 통념을 민심이라 표현해 왔고, 민심이란 이름의 통념은 기득권 세력이 그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교묘히 다루어야 할 도구였다. 그래서 통념을 가운데 두고 백성과 기득권이 표리부동하며 불편한 동거를 지속해 왔다. 그것이 우리네 역사의 뼈대였다. 임금은 민심을 잘 달래야 하고, 백성은 그런 임금을 섬겨야 한다는 논리는 따지고 보면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중요했다. 국가 운영 체제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 속에는 공공연한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위정자의 노회함과 백성의 무지함이 균형을 이룰 때만 평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1894(고종 31)년의 동학농민혁명은 백성의 '역린'을 건드린 결과였다. 우리네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질곡은 쌍방 간 균형추가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칠 때 요동쳤다.
나는 현대에는 두 균형추가 좀 다른 관계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이유는, 우선 통념의 주체인 대중의 학력이 이전과 비할 바 없이 높아졌다. 이것이 중요하다. 배운 자들의 의식이 조선시대 평민과 다를 바 없다면 배움이 다 무슨 소용인가.
배운다는 것은 철학을 정립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너무 거창하다면, 신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철학이든, 신념이든 가지려면 만만찮게 배워야 한다. 이때 배운다는 것은 교과서에 나오는 걸 이해한다는 것을 넘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세상 이치를 깨달으려면 궁리를 해야 한다.
배움은 시험 문제 하나 더 맞춰 대학에 합격하고, 입사시험에 통과하는 것으로 그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입시 입사는 그 시기, 때에 맞게 자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각자의 삶을 꾸려가는 일종의 관문에 지니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입시와 입사를 절대 관문으로 여긴다. 입시에 낙방하면 인생 실패자로 낙인찍고 찍힌다. 입사에 실패하면 학벌과 상관없이 루저가 된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어째서 한 번의 낙방과 한 번(수 번 일지라도)의 입사에서 명쾌하게 통과하지 못한다고 해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이 모두가 제대로 못 배운 탓이다. 배움의 목표를 기껏 입시 입사에 두고 있으니 제 삶을 알차고 보람 있게 경영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물론 '서울대에 가자' '삼성에 입사하자' '공무원이 되자'도 작은 목표라 할 순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배움의 목표가 오직 입시고 입사면 그 이후의 목표는 막연하고 막막해진다. 대한민국의 고교 학력 수준이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면서도 서울대에만 진학하면 그 학력 수준은 곤두박질친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배움의 목표는 응당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해 사회에 보탬이 되겠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 목표는 무지하면 세울 수 없다. 그래서 배워야 한다. '나는 어떻게 사회에 보탬이 될 것인가'는 철학의 문제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철학과를 나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배움은 근본적으로 자기성찰을 필요로 한다. 어떤 학문을 하든, 어떻게 사회적으로 이롭게 할까를 생각하고, 그 답을 얻어 실천하는 게 바로 철학이다.
나는 여태껏 공무원이 되겠다는 청춘들 중 청사진을 갖고 공무원이 되겠다는 자를 보지 못했다. 또 공무원들 중 공직자의 사명을 자신있게 피력하는 이를 만나 본 적이 없다. 만약 우리 사회 대졸자들이 철학을 가졌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시생이 되겠다고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다만 생각해 볼 문제는 배웠다는 대중이 판치는 21세기에도 평민과 위정자간 절대적 모순관계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바뀌어야 하는 것은 위정자가 아니라 대중이어야 한다. 그 똑똑한 머리로 철학을 잘 정립해야 한다.
/작가 심보통 2014.1.18
[시선 1편-공시생 100만 명 시대... 절망의 시대] https://masilwa.tistory.com/entry/%EC%B9%BC%EB%9F%BC-%EA%B3%B5%EC%8B%9C%EC%83%9D-100%EB%A7%8C-%EB%AA%85%EC%8B%9C%EB%8C%80%EC%A0%88%EB%A7%9D%EC%9D%98-%EC%8B%9C%EB%8C%80?category=302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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