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이원경과 서명원

#이원경과 서명원


두 사내가 있다. 이원경과 서명원. 둘은 닮았다. 이원경은 영남대 교수이고, 서명원은 서강대 교수이다. 둘은 다르다. 이원경은 퇴계 선생의 14대 후손이고, 서명원은 푸른 눈을 가진 프랑스인이다. 
이원경은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가르친다. 서명원은 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친다. 이원(58)이 서명원(61)보다 두 살 적다. 이원은 올초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서명원은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는 성철 스님(1912~93) 비판서를 펴냈다. 

이해관계자들에게 둘의 선택은 충격(Shock) 그 자체였다. 노석균 영남대 총장은 이원경을 만나 "나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성철 스님 신봉자들은 서명원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공분을 표시했다. 서명원은 다름 아닌 자타가 공인하는 '성철 신봉자'였다. 
이원경은 "열정이 사그라들었는데 교육자로서 양심상 어떻게 강단에 남아 있겠느냐. 더 열정 있는 후배들이 들어오게 하는 게 맞다."고 퇴직 사유를 밝혔다. 서명원은 "결국 학자적 양심에 충실하기로 했다. 성철 스님에 대한 칭찬은 많다. 칭찬 하나 더 보태는 건 의미가 없다."고 신간 의의를 밝혔다.
우리 언론은 두 사람을 뉴스에 담는다. 귀감의 사례로 독자 밥상에 올린다. 하나 두 사람의 행동이 정상이다. 이것을 귀감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이가 인격적으로 더 훌륭하거나 교양이 뛰어나거나 의식이 있다고 말해선 안 된다.
몇 년 사이 학교폭력이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는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교권이 바닥이라는 소식도 심심찮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하는 학생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나는 여태껏 "제자 간수(看守) 잘못한 점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염치껏 사직서를 제출하는 교장과 교감과 교사를 보지를 못했다. 우리사회는 한 마디로 한심한 교양과 의식과 인품을 가진 자들이 스승이라고 한 자리씩 꿰차고 있다. 비겁하고, 졸렬하고, 조잡한 자들이 스승이란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이들에게 지식인이라는 별칭도 달아주었다. 
에드워 사이드는 이런 자들을 위해 경종을 올린다.
"지식인은 경계 밖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추방해야 하는 자이다(…). 그는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 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며(…)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이다."
이원경은 "학자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발견을 해서가 아니라 퇴직과 관련해 주목을 받는다는 게 참으로 부끄럽다."며 "부디 저에 대한 관심을 접어 주시길 바란다."고 취재기자에게 전했다. 서명원은 "(성철) 스님은 단박에 불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강조했다. 점진적 수행, 즉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인정한 지눌(知訥·1158∼1210) 국사(國師)를 비판해 유명해진 이른바 ‘돈점(頓漸) 논쟁’을 불렀다."며 "오늘날 한국 조계종은 공식적으로 성철의 입장을 따른다. 그가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성철의 선사상도 시대의 부산물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상대적이다."라며 학자적 양심에 따랐다.
그렇다고 이원경과 서명원이 구차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일삼는 자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제 삶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진중 (珍重)하게 여기는 데 족할 것이다.
문제는 타자를 탓할 게 아니라 이원경과 서명원의 삶의 자세를 투영하려는 이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인데, 그건 밥상머리 교육부터 근간이 심어져 있지 않으면 결단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자기성찰, 자기반성은 의식체계가 똑바로 잡혀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심보통 2014.1.25

*중앙일보 2014.1.10, 11자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