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기자님, 잘 계시죠?"(나는 전직前職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자를 관두고 몸소 느꼈고, 느낀다.ㅎㅎ)
"네."
"배꼽여행(사진) 이라는 책을 한 번 사 보시라고요. 스토리텔링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 같아서요."(나는 현재 스토리텔링 방법론 책을 짓고 있다. 내년 3월 출간 예정으로 이 책이 나오면 일단 스토리텔링전문가라고 자처하던 교수들이 곤혹스러울 것이다.)
"어떤 책인데요."
"제천시장 지냈던 엄태영이란 분이 지은 책인데, 아주 볼 만해요."
"그 분 내년 총선 출마하십니까."
"네."
"알겠습니다. 참고하지요."
메모 노트에 '배꼽여행, 엄태영'이라고 적어뒀다. 하지만 메모는 습관적인 것이어서 그대로 잊고 지냈다.
한 달이 흘렀다. 나는 그 새 '스토리텔링 2.0-실전 스토리텔링'(가제) 진도를 좀 뺐다.
엊그제 다시 대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심 기자님, 책 한 권 보내드리려고요."
"무슨 책을요."
"지난 번 말씀드린 배꼽여행요."
"아, 네. 고맙습니다."
나는 놀랍게도 퍼뜩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최근 소장하고 싶은 책 두 권이 생겼는데, 이 분께 부탁하면 어떨까.'
"저기, 소장님. 책 두 권을 더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죠. 무슨 책이요."
"땅의 의미이란 책하고, 한 권은 문자로 찍어 보내드릴게요."
"네."
그렇게 배꼽여행과 함께 '옛 편지 낱말사전(돌베개)'과 '땅의 마음(사이언스북)'을 받기로 했다. 기자시절 이 분께 책 선물을 더러 한 적 있어 마음 편히 부탁했다.
곧 도착할 거란 책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문자로 사연을 물었다. 따끈따끈한 신간이 대구교보까지는 깔리지 않은 탓인지, 인터넷 주문으로 수령한 뒤 다시 보낸다고 늦어졌다는 설명이었다. 오후에 보낸다고 했다.
어제(30일) 새벽 문자가 왔다.
'주무세요.'
'아뇨, 아직. 이 야심한 시각에 어쩐 일로...'
'내일 서울 가는데 책을 직접 전하게요.'
'그래요. 그럼 봐야죠.'
'이대에서 2시에 봐요. 3번 출구.'
'네.'
이리하여 이대 대강당 앞에서 이 분과 6개월 만에 조우遭遇했다. 이대 앞에서 늦은 점심을 했다. 점심 먹으면서 대충 '배꼽여행'을 들춰봤다. 그렇대도 이 때만해도 나는 솔직히 '배꼽여행'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문화지리학 교수인 윤홍기 선생이 쓴 '땅의 마음'에 호기심이 동했다. 점심 후 신촌 현대백화점엘 함께 잠깐 들렀다, 헤어졌다.
'옛 편지 낱말사전'은 문자 그대로 사전이어서 참고할 자료였고, '땅의 마음'을 탐닉하러 부러 일찍 귀가했다. 그런데 내 손에 잡힌 건 '배꼽여행'이었다.
'배꼽여행'은 엄태영 전 제천시장이 제천, 단양, 영월 등을 1년간 탐방하고 구석구석을 시종 한 투로 전하고 있다. 이 책은 옛 것들을 현대의 시각으로 풀어내는데 길이와 내용 면에서 적당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도록 한다.
자신의 의견을 전했을 뿐인데, 적잖은 대목에서 '현대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자각自覺과 반성反省을 이끌어낸다. 그 자각과 반성은 1천 마디 말보다 더 강렬한 사진들이 곳곳에 박혀 애오라지 체감體感토록 만든다. 그는 옛 것을 조근조근 이야기하며, 현대 것의 의미를 되새기는 '올드&뉴Old and New'식 서술을 택했다.
엄 전 시장은 서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 2010년, 나는 스스로에게 2년이라는 안식년을 주고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위해 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바쁘지 않게 여행하기,
박사과정 시작하기,
에스프레소 직접 뽑아 마시기,
운동으로 살빼기,
아내와 듀엣으로 기타 연주하기를 열심히 하고 있다.
이 책은 나의 안식년 1년 동안 '바쁘지 않게 여행하기'의 흔적들이다.
그는 바쁘지 않게 여행도 했지만, 여행을 아주 제대로 한 것도 같다. 이 책을 보아하니 그렇다. 나는 정말이지 이 책을 사진 몇 장 더 보겠다고 들췄다가 단박에 폭 빠져 버렸다. 329쪽까지 단숨에 종주해 버렸다.
그의 생각을 읽어가면서 일면 놀랍다고 여겨지지만, 위정자爲政者라면 응당 이 정도 철학哲學은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당연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는 제천, 단양, 영월, 평창, 봉화, 영주- 이 6개 지역이 20~30년 뒤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좋은 곳으로 각광받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오롯이 품고 있다는 걸 주된 근거로 삼는다. 6개 지역 단체장이 지역발전을 위해 7년째 모임을 가져온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의 관심은 중부내륙의 여섯 도시가 세계가 주목하는 지속가능한 친환경 미래도시로 재조명 되는 것과 함께 지금껏 소외돼 왔던 여섯 도시의 사람들이 함께 잘 사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일환의 1탄일 뿐이다. 그는 언젠가는 2탄으로 영주, 평창, 봉화에 관한 여행 이야기를 내놓을 작정이다.
이 책은 골목길, 마을, 축제, 장, MT, 놀이, 계곡, 드라이브, 산책, 절, 밥, 잠, 더불어 등 13개 장으로 구성됐다.
그는 숱한 이야기를 풀어 헤치면서 이렇게 설파說破하고 있다.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해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면 전시되지 못하고 보관실을 벗어나지도 못하듯 여기도(이 책에 등장하는 장소) 사람들이 찾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이라는 절박함이 있다.
흔히 문화산업을 '굴뚝 없는 산업'이라고 한다. 공해와 자연 훼손 없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산업이기 때문이다. 그도 '축제'편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다.
전국의 자치단체장도 이걸 모를 리 없다. 하나 절대 다수가 말로만 그 당위성當爲性을 이야기하면서 공수표를 남발하고 있다. 알맹이 있는 얘기가 되려면 엄 전 시장 같은 방식 정도는 돼야 한다.
이 책은 40~60대 중노년층에게는 옛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할 거고, 10~30대 유장년층에게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길라잡이가 족히 될 것이다. 이해가 부족한 부분은 어른들께 잠깐 귀동냥하면 세대간 소통도 가능할 터다. 이래저래 좋은 책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출마자들의 출판물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대필代筆이 학계에선 큰 문제가 되지만, 이쪽에선 당연시되는 풍토 탓에 '배꼽여행'을 색안경 끼고 본 측면이 강하다.
내 선입견 탓에 선물이니 버리지는 못해도, 어디 한 구석에 쳐박혀 빛을 보지 못했을 책인데 천만다행으로 내 손아귀에 들어왔고, 두 눈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기어이 쫓아가게 만들었다.
이 책, 제법이다. 지역을 사랑하는 방법론이 담겼다. '지역 사랑은 이렇게 해야 한다'식의 교조적敎條的 서술이 아니라 읽고 봄으로써 '이런 게 지역사랑'이라는 걸 느끼도록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지역사랑법이 입체적으로 떠오를 거다. 이 책을 전국 자치단체장들에게 권하는 이유고, 실은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쓴 전부다.
나는 기회가 되면 엄태영 전 시장을 꼭 한번 뵈어야겠다.
사족: 이 책에는 띄어쓰기가 잘못된 데가 두 곳 있다. 찾는 재미는 양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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