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본질
우리가 교육받는 까닭은 대학 진학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대학 진학 이전까지는 맞고 틀림 수준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다. 대학 진학 이후에는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문제 있음을 감지하기 위해서다. 하나 많은 학생들은 이를 감지하지 못한다. 배움의 폭과 깊이가 약간 넓어지고, 확대되면서 얼핏 감지 가능한 수준이다.
대학원에 진학해 보면 교육의 소이는 보다 분명해진다. 대개 논문을 쓰면서다. 하나의 주제가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같은 주제라도 연구자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온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실은 진정한 교육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단계는 대학원 수료 후 졸업논문을 쓸 때다. 그전까지 배운 것은 교육을 명분으로 민중을 통제하고 통솔하기 위한 지배층의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가 흔히 교육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실은 지배층이 쳐 놓은 그물망으로 최대한 많은 민중을 몰아넣는 것이다.
박사논문을 쓴 사람 치고 호락호락한 사람이 별로 없다. 아집에 사로잡혔든, 세상 이치를 깨쳤든 박사학위 소지자들에게는 타자와 동화되지 않는 고유의 별남이 있다. 별나다는 것 혹은 고집스러움은 마에스트로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다.
그런데 어설프게 배우면(무늬만 박사면) 이 별남과 고집은 별종과 오만의 잘못된 이름이 될 수 있다. 배워서 자기만의 학문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설계했다는 것보다 그 과정을 파헤쳤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그 과정이 없었더라면 배운 값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아직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부연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동학(東學)은 기껏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전봉준이다. 민족종교의 창시자 최제우, 도통을 이어받은 최시형. 그는 최제우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정리했다. 동학농민혁명 국면에서 전라도에서는 전봉준이, 충청지역에서는 최시형이 주도했다. 동학난으로 박살난 동학은 후에 3.1 운동을 주도하면서 기사회생한다. 손병희가 그 중심에 있었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가 우리가 교육받은 동학의 전부다. 이를 쉽게 '공인된 역사'라 하자.
그런데 상주동학이란 게 누군가에 의해 새롭게 밝혀졌다. 이걸 공인된 역사로 편입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이 대목에서 배움의 까닭 문제와 직면한다.
지배층이 쳐 놓은 그물에 갇힌 민중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배운적 없음'으로 일관한다. 연구자들이 공인된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단순무식한 민중들에게 새로운 역사를 인식시키는 일은 현대에 들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무조건 부정하는 것만큼 무식의 절대고수가 없다.
학문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다르다. 사명을 갖고 집요하게 달려든다. 곳곳이 허물어야 할 벽이고, 설득해야 할 적이다.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맞다 그르다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다. 그 안목을 키우지 못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지배층들이 통솔과 통제을 위해 쳐 놓은 그물(시스템) 안에서 지배층의 통솔과 통제가 용이하게 자발적 방패막으로 살다가 죽는 단순도구에 불과해진다.
배운다는 것은, 안다는 것은 실로 고집스러워지는 것이다. 동시에 내가 얼마나 무지한 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해서 인류를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다.
/2015.2.6. 심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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