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강신주
강신주. 사람들은 그를 철학자라 부른다. 물론 그 스스로도 그렇게 칭한다. 아마도 그가 철학박사 학위 소지자이고, 철학 서적을 다수 냈기 때문일 게다. 어제 예능 프로 <힐링캠프>에 출연했다. 제작진이 녹화 전에 시청자들의 사연을 받아 선정한 뒤 강신주로부터 인생 상담을 받도록 했다. 명분은 시청자와 출연자 간 쌍방소통이었다. 이를 방송에선 '기획의도'라고 하겠다.
강신주 말고 철학자 강신주는 요즘 핫(Hot)한 모양이다. '직설화법'으로 타인의 삶에 훈수를 놓는다. 그걸 언론은 '돌직구 화법'이라고 거친 포장지를 씌웠다. 어제(4일)도 강신주는 돌직구로 승부를 걸었다. 시청자와 소통이 이루어졌을까. 모르긴 몰라도 후하게 쳐도 6:4정도로 나쁜 평가가 더 많았지 싶다.
우리는 소위 유명인의 말에 쉽사리 수긍하는 경향이 있다. 곰곰이 따져 보면, 한평생 농사만 짓고 사신 이웃집 할아버지보다 깊이가 없는 말인데도 '대중적'이라는 사실 하나에 귀를 쫑긋 세운다. 제 부모, 친구, 스승의 말은 안 들어도 그런 사람의 말에는 곧잘 수긍한다.
강신주는 배우긴 배운 자다. 좀 깨친 자이기도 하다. 하나 그것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인생 훈수가 어디 박사학위 땄다고, 남들 보다 책 좀 더 봤다고 될 일인가. 남의 인생에 적확한 진단을 내리려는 시도 자체가 난센스다. 하긴 그 난센스의 놀이도 기꺼이 참여하는 상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말은 생각의 반영이자, 마음의 표출이다. 생각이 많으면 말이 많아질 확률이 높다. 소통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자신하기까지 하면 그 말은 끝끝내 화를 자초한다. 말의 논리성은 글의 논리성과 다르다. 글재주가 좋다고 말재주도 뛰어난 것은 아니다. 글의 본질은 조작(造作)이다. 말의 본질은 조직(組織)이다. 조직된 것은 조작된 것보다 완벽할 수가 없다. 감동의 빈도가 글에서 더 많은 것은 이런 이유다.
강신주의 가장 큰 문제는 그걸 아직 못 깨쳤다는 것이다. 그 다음 문제는 인격체의 생김과 본성과 체질과 인격이 다름을 너무 쉽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그의 화법에서 느낄 수 있다. 그는 그저 그가 배운 지식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 채, 그것도 아주 조금 소화한 채 자기 식으로 세상과 사람을 대하고 있다. 재단(裁斷)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 알량한 대중성이란 옷을 입고 말이다. 배운자가 그래선 곤란하다.
인생 공부는 남의 말 들어서 되는 게 아니다. 인생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다. 강신주에게 상담 받을 시간에 쇼펜하우어의 <삶과 죽음의 번뇌> 같은 책을 속독하고, 다독한 뒤, 한 문장 한 문장을 제 깜냥대로 받아들이는 게 훨씬 살아가는 데 도움 된다. 만약 강신주의 책이 훌륭하다면 그것을 읽고 또 읽어서 세상 이치를 알아가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
쇼펜하우어 식으로 강신주를 풀면, 강신주는 본문 인생(공부하면서 삶의 의미를 알아간 인생)을 살았으니 각주 인생(생의 전선에서 경험하면서 삶의 의미를 알아간 인생)을 산 사람들보다는 조금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본문 인생이 각주 인생보다 늘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배움을 평생 경 읽기나 하다 끝낸 박사도, 지성인도 부지기수다.
20세기 최고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인간이 인간에게 도움 되는 사회'를 꿈꾸며 사회주의에 매료되어 평생을 살았다. 그랬던 그가 <후손들에게>라는 시를 통해 말년에 고백한다. 인생 헛살았다고! 그리고 이 세상과 작별했다.
우리는 신발보다 더 자주 나라를 바꾸어가면서/불의만 있고 분노를 모르는 현실에 절망하면서/계급의 전쟁터를 누비며 걸어왔다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알게 되었다네//
비천함에 대한 증오 역시/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증오 역시/목소리를 쉽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인간성의 터전을 마련하려 하였거늘/우리 스스로가 인간적일 수 없었다네//
그에게 이 세상은 천상병과 같은 소풍놀이가 아니라 지옥구덩이였으리라. 삶은 이처럼 겁나는 것이기도 하다. 강신주의 돌직구 식 조언이 있다면, 주철환 PD 같은 '따뜻한 말 한마디'식 조언도 있다. 어차피 세상살이의 정답을 알 수 없다면, 강신주 것도 참고하고 주철환 것도 참고하자는 양시론은 무지의 소산이다.
누구든 삶은 아름다워야 한다. 거칠 게 인생 조언을 들어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단편적이고 일방적으로 인생 조언을 듣는 것은 제 자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강신주는 지금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할까. 그의 생긴 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옛 어른들이 '나이 마흔이면 제 생긴 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 괜히 하신 게 아니다. 말로 흥한 자의 말로가 좋았던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배웠다는 자들의 인생 훈수는 이런저런 모양의 삶을 들려준 뒤 이렇게 말하는 정도면 공자 뺨치는 수준이다.
“잘 고민해 봐. 정답은 네 마음속에 있는 거니까.”
/심보통 20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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