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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이제 우리 스마트폰을 걷어찰 때

#이제 우리 스마트폰을 걷어찰 때

어제 신혼살림을 장만하기 위해 하이마트로 갔다가 휴대폰도 교체했다. 집사람될 사람은 내 행동에 당황스러워했다. 대체 이 갑작스러운 행동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는 눈치였다. 하긴 그 사람 입장에 보면 내 행동이 화를 낼 일도, 그렇다고 기뻐할 일도 못되는 것이다. 그 사람 심정을 넉 자로 표현하면 '대략난감'일 테다.
2년 반쯤 전, 사용하던 아이폰이 갑자기 먹통이 되는 바람에 갤럭시S2로 바꿨다. 당시 새 모델(갤3)이 출시돼 내가 구입한 폰은 구형폰이었다. 새 모델은 비쌌고, 갤S2는 그나마 싼 편이었다. 36개월 약정으로 샀었드랬다. 아이폰이 언질(?)도 안 주고 사용 2년 만에 운명하신 걸 보면, 이 폰도 3년은 못가겠다고 지레짐작되었다.
역시나 근래들어 자주 멈추고, 귀신 들린 듯 혼자서 꺼졌다 켜졌다를 수시로 반복한다. 가실 때가 되었다 싶어 휴대폰을 바꿀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휴대폰을 사면 나는 폴더폰을 사리라 마음을 굳혔었다.
전화는 실용적이고, 간편해야 한다는 기본을 지향하면 스마트폰은 비싸기만 할 뿐이고, 쓸데없는 기능만 많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문화산업 종사자인 나만의 시각이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이 좋고, 편하기 때문에'라는 틀에 갇혀서 산다. 이 틀은 누가 만들었느냐. 거대 통신사들이 만들었다. 
스마트폰 유저들 중 상당수는 '남들이 좋다고 하니 좋은 거고, 남들이 편하다고 하니 편한 거고, 남들이 있는 거니 나도 하나쯤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질은 '스마트폰 통신사들이 이런 틀을 만들어냈고, 그 틀로 5,000만 대한민국 국민 중 78%(3,900만명)를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스마트폰이 좋고, 편한 것이 아니라 많이 사용하니 좋아지고 편안해진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스마트폰은 이기를 능가하는 불편함과 비극의 도구가 돼버렸다. 불편함은 예컨대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타자로부터 곧잘 노출된다는 것이다.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같은 SNS가 그걸 잘 말해주고 있다. 비극은 청소년 폭력의 단초가 되고, 성폭행, 자살 같은 강력 범죄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아니 나는 스마트폰을 버릴 수 있는가. 내가 스마트폰을 버리는 순간, 나는 사회의 틀에서 조직의 틀에서 이탈하는 것이고, 어쩌면 낙오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하나 그게 전부일까. 나는 사회에서 이탈하고, 낙오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버리는가. 아니다. 스마트폰은 '똑똑한 폰'을 표방한 그저 '분잡스러운 폰'일 뿐이다. 폰은 그저 폰이면 족하다.
그런데 이미 통신사에, 스마트폰에 길들여진 우리들 시각이 문제다. 집사람이 당황해한 것도 전국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최신형 스마트폰도 아니고, 이제는 '천년기념물' 급인 폴더폰을 구입하다니,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시각 탓이다. 
폴더폰을 사면 잘못된 것인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인가. 
스마트폰 시장을 키운 건 누굴까. 20대와 30대였다. 하나 이건 겉 진단에 불과하다. 진짜 이 시장을 키운 건 20대 자녀를 둔 50~60대 부모였다.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100만원을 호가는 최신 휴대폰을 살 것이며, 2년6개월~3년 약정을 건 '(이상한) 공짜폰'을 사용할 것인가. 
부모의 자식사랑은 하해(河海)와 같아서 막 퍼준 결과다. 그리고 퍼주기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것은 경제력 가진 '부모 스스로'다. 
이제 남녀노소할 것 없이 스마트폰쯤은 사용해줘야 문화인이다. 웃기는 소리다. 문화인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문화인이란 자로고 주체적 소비자로서 사리분별을 똑바로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주체적 소비자인가. 통신사가 풀어놓은 목줄을 스스로 옭아 맨 소비자인가. 
이 문제는 진짜 우리가 스마트폰이 아니면 살 수 없는가. 스마트폰을 가져야만 문화인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게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국을 떠도는 스토리텔링전문가요, 기자다. 그런 내가 스마트폰 필수 사용인구 중 상위 1% 안에 들지 못하겠는가. 그런 내가 하위 60~99%가 선택해야 자연스러운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니 집사람도 놀라면서도 걱정이 앞서고, 우리 가족도 반응은 비슷했다. 반응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다.
"당신은 불편할 게 없지요. 상대방이 불편하겠지요."
"스마트폰 없이 불편해서 얼마나 오래 가겠나. 일단 한 번 써보긴 해라."
첫 번째 반응은 옳다. 당장 업무상 카톡에 즉답을 못하게 생겼으니 주로 상대가 불편할 것이다. 나는 필요하면 문자메시지로 사용하고, 안 되면 전화를 직접하면 되니까. 
두 번째 반응 역시 틀리다고만 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몸에 밴 습관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는 없으니까. 당장에 대중교통으로 이동 중에 가능했던 인터넷 검색, SNS 이용 등에 제약이 생겼다. 하나 습관은 바꿀 건 바꾸고 고칠 건 고치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으뜸 동물이다. 일단 써보는 게 아니라, 그냥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내가 폴더폰을 사기로 한 데는 이 두 가지 반응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묘안이 이미 기술적으로 해결됐기 때문이다. 주로 쓰는 카톡은 컴퓨터 기반으로 사용하면 되고, 굳이 쓰겠다면 갤S2를 와이파이 지역에서 사용하면 될 일이다. 하나 카톡으로 보는 '장문업무'는 주로 컴퓨터 기반 카톡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소소한 메시지는 폴더폰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예견한다. 앞으로 나와 같이 '도로 폴더폰족'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는 국민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10명 중 8명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작금의 현실은 합의일치 된 통신사의 기술과 상술 발전속도가 각자도생하는 개개인의 의식 성숙도를 능히 능가하기 때문인데, 그게 다가 아니다. 느릴 뿐 의식이 성숙한 주체적 소비자(문화인)들도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조금씩 늘어갈 것이다.
나는 그 행렬의 앞에 섰을 뿐이다. 따라들 오시라. 신천지가 열릴 것이니.
/심보통2014.8.18



덧붙임: 1998년 벽돌 모양의 모토로라 휴대폰이 국내에 등장했을 때,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대륙에서는 휴대폰 열풍이 진작부터 불고 있었다. 그때 우리 '고상한 국민들'은 휴대폰 사용자들을 '뗏놈들보다 못한 저급한 놈들'이라고 비아냥 됐다. 그 '고상한 국민들'은 이제 '저급한 놈들'이 돼버린 채 여전히 '고상한 척'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