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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돼지가출사건


#[마실話] 돼지가출사건

내가 어릴 적에 우리 마을에는 집집마다 가축을 키웠다. 
농사를 지어야 해서 소마구에는 누렁이가 있었다. 새끼를 잘 쳐 시장에 내다 팔기 수월한 토끼를 키우는 이웃도 있었고, 계란과 닭고기를 자급자족하기 위해 닭을 키우는 주민도 다수였다. 간혹 도랑 다리 밑을 점령한 시꺼먼 염소떼를 사육하는 집도 있었다. 집지킴이로 누렁이(일명 똥개)를 기르는 가구도 마을에 널린 논밭처럼 흔했다. 

그 중에서도 돼지는 소와 함께 번듯한 집을 가진 가족 같은 동물이었다. 장날 김천 황금시장에 나가 새끼돼지를 사다가 돼지마구간에서 한 6개월 키우면 적잖은 돈이 됐다. 그걸로 집안 대소사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다시 새끼돼지를 사다 키워 내다 팔기를 반복했다. 시골에서 가축이란 가계경영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당시 풍속상 가축을 사오고 기르고 내다 파는 일은 여성의 몫이었다. 집안 살림은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여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사회 환경이 변하고, 풍속이 덩달아 바뀌면서 시골의 사정도 완연히 달라졌다. 

1970년대 산업화의 결과로 우리 마을 젊은이들도 썰물처럼 도심으로 빠져나갔다. 산업화는 시골마을 풍경을 많이 바꿔놓았다. 내 기억으로는 1988년 올림
 이전까지는 산업화 충격이 살갗에 그다지 와 닿지는 않았다. 다소다노(多少多老)의 우리 마을은 서울올림픽 이후 급속히 소소다노(少少多老)로 바뀌어갔다. 그렇게 노인의 도시, 고요한 도시, 야밤 무인도시로 변해갔다. 


그런데 우리네 삶은 증거하고 증명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공을 초월해 인간사는 유전(流轉)한다는 것을. 그리고 유전 이전에 유전(遺傳)이 있다는 것을. 

10년간 고요했던 마을에 다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부부가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전형적인 농촌사회였을 적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가축을 기르는 가구도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엊그제 앞집에 새끼돼지 두 마리가 울산에서 공수되어 왔다. 두 놈 중 한 놈이 야밤에 사라졌다! 돼지 주인은 한밤 돼지 색출 작업으로 식겁하며 식은땀을 뺐다. 돼지는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버렸다. 

다음날 이른 아침, 동네 스피커에선 주민 돼지 발견 신고 방송까지 흘러나왔다. 1980년대 익숙했던 풍경을 스마트폰 시대, 1가구 1자동차 시대에 우리는 다시 유전(遺傳)을 목도하는 것이다. 이 용감한 돼지는 오늘도 우리를 뛰쳐나와 마을길의 소심한(?) 점령군이 되었다. 

할머니가 돼지를 보고 말씀하셨다. 
"뉘집 돼진고?" 
"이 집요." 
할머니는, 
"허허." 
-헛웃음을 짓더니, 
"저래 두면 안 될 텐데."
-하셨다. 

진풍경을 놓칠 수 없어 카메라 셔트를 연방 눌렀다. 새끼돼지는 이내 슬금슬금 다시 제 주인집으로 들어간다. 필시 암컷이리라... 하지만 제 집으로 '셀프 귀가'는 난망해 보인다. 
집주인에게 전화를 넣었다. 
"아저씨, 또 돼지 탈출했어요." 
10분쯤 흘렀을까,
"퀙엑, 퀙퀙퀙."
-돼지 멱따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돼지가출사건은 일단은 일단락되었다.


찍은 사진을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시 보니 문 앞에서 새끼돼지와 맞딱뜨린 할머니의 심정이나 높다랗게 우리가 쳐진 제 집 앞에 선 새끼돼지의 심정이나 매 한가지지 않을까 싶다. 대략난감. 추측컨대 이 단어는 1900년대 초반에 탄생한 신조어가 아닐까 싶다. 무엇이든 생경한 상황의 시작은 발생하고, 그것이 빈번해지면 일상사가 되는 것인 고로. 
/심보통2014.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