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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불변의 로맨스를 꿈꾸는 연인들에게

#불변의 로맨스
그제 출근길. 결혼 18년차 직장맘과 직장대디는 언제나처럼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밖은 진눈깨비가 섞인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직장대디는 "어, 비가 오네. 우산을 가져와야 겠다."며 냉큼 엘리베이터로 다시 돌아갔다. 직장맘은 무심히 기다렸다. 하지만 우산을 가지러 가겠다던 직장대디는 곧바로 되돌아왔다. 직장맘이 의아해하며 "왜?"라고 하자, 직장대디는 "너 점퍼에 모자 달렸네. 너가 차로 가서 우산 가져오면 되겠다."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직장맘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아침부터 말싸움을 하기 싫어 모자를 덮어쓰고 뚜벅뚜벅 주차된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십수미터 거리에 있는 차까지 가는 동안 직장맘은 참 서럽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타며 울컥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래도 울면 지는 거라고 마음을 다독이며 차에서 우산을 꺼내 다시 직장대디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날 점심시간, 직장맘은 아직 신혼의 달콤한 맛에서 헤어나지 않은 후배와 미혼 후배 몇을 앉혀 놓고 "아, 이런 게 18년차 직장맘의 현실인가 싶더라."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끝에 방점을 찍었다. 
"너희들도 잘 알아둬. 남자라는 동물이 하나같이 이래! 연애할 때는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줄 듯 하다가 결혼 후엔 그걸 무슨 수로 따느냐고 되레 화를 내지."

그날 밤, 여자친구가 내게 물었다.
"자기도 변할 거지?"
"응? 나는 변할 게 있긴 해? 별로 잘 해주는 것도 없고, 내가 허투로라도 별을 따다 준다길 하디, 달을 따라 준다길 하디. 나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는 안 하잖아."
"흥! 그게 더 나빠. 지금도 그런 식인데, 결혼하면 오죽 하겠어."
"그렇게 생각해?"
"살아 본 분들이 다들 그렇게 말하니깐."
살아 본 분들... 여자친구가 말하는 살아본 분들은 직장 선배이거나 대학 선배일 테다. 그 중에서도 살아본 여자 선배들이 태반일 테다.
나는 여자친구가 약간은 흥분한 듯하면서도 들뜬 듯 이야기할 때 희열을 느낀다. 콘텐츠를 떠나 그녀가 관심 있어 하는 그 무엇이, 무엇일까 궁금할 때가 아직은 더 많기 때문이다. 똑같이 35년을 다르게 살아왔지만,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고작 2년뿐이다. 아직 알아야 할 것이 많다. 
그런데 여자친구의 관심이 특정지점, 그러니까 이성 관계 중에서도 '남자가 여자에게 잘해주기' 같은 데로 모아지면 나는 늘상 웃을 수밖에 없다.
여자들은 로맨스를 진리 다루듯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불변의 로맨스'를 꿈꾸는 것 같다는 말이다. 연애에 빠진 남자는 여자친구 앞에서 이런 시를 읊거나, 연서에 담아 줄 수 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지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더 달콤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랑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 전문

정말이지 사랑에 빠진 수컷은 조건 없이 한 여자의 노예(?)를 자처한다. 여자친구가 시키면 시키는 족족 하는 걸 넘어 시키지도 않은 일도 하겠다고 나선다. 제 부모형제에게도 보이지 않던 불가사의한 행동을 갓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하늘의 별과 달을 따다주겠다는 무모한 발상이 그런 것이다. 
만국공통인 것인지, 유독 우리네 정서에서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애꿎은 별과 달이 연애에서 단골 메타포(metaphor)가 된 기원은 찾아볼 수도 없다. 열정적이건 순애보건 아무튼 별과 달은 형형색색의 '러브 심볼'인 것이다. 
여성들도 안다. 별과 달은 죽었다 깨어나도 슈퍼맨 같은 남자친구일지라도 따올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남자친구에게는 일말의 실망도 느끼지 않는다. 실망은커녕 남자의 사랑이 진실되다고 믿는다. 그렇게 여자와 남자는 로맨스의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격정적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어느 순간 '내 남자가 변했다.'고 단정하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심지어 분노한다. 그러면서 여자는 '불변의 로맨스'를 입에 올린다. 그렇다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를 따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 남자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음을 문제 삼는다.


사랑하기에 생긴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대체 누가 가지고 있는 걸까. 남자? 여자? 정답은 여자다. 로맨스는 변해야 로맨스다. 20대에 하던 행동을 애가 둘인 40대 남편이 한다고 생각해 봐라. 그건 불행이다. 여자는 '불변의 로맨스'를 구구하게 언급할 때, 실은 자신이 취사선택한 이야기만 입 밖으로 뱉는다.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여자의 말마따나 남자는 변한다. 하지만 여자도 변한다. 남자와 여자만 변하는 게 아니다. 시간이 가면 만물이 변한다. 일상의 조건이 변하고, 사랑의 환경이 변한다.
여자친구로부터 "하긴 자긴 지금도 잘 해주는 것도 없는데..."라는 이야기를 듣는 나이지만, 나는 남자들이 좀 더 초연한 사랑을 하는 게 맞다고 본다. '남자라는 동물은 다 그래.'라는 말을 하는 여자를 탓할 게 아니라, 남자가 제 감정에 치우쳐 세상 모든 걸 다 해 줄 것처럼 공수표를 남발하는 구애는 현명하지도 좋지도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랑은 거창하지 않아야 좋다. 플라톤은 "사람은 사랑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다. 셰익스피어는 "연인과 광인과 시인은 동일한 존재"라고 했다. 사랑에 빠진 이라면 소박한 시인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하면 좋을 것 같다. 사랑을 표현하고, 기록하는 일만큼 미래의 행복을 일정부분 담보하는 일이 없을 것 이기에 하는 말이다.
사랑의 결실로 결혼에 골인하게 되면,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노력을 연애 때보다는 좀 더 하면 좋을 것 같다. 

괴테는 <파우스트>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장식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인도한다."
'여자 말을, 아내의 말을 들어주어서 손해 볼 건 없다.'는 것이야말로 살아본 분들의 주옥같은 명언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도 한참을 더 살아봐야 명언의 진위 여부는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심보통201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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