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고승덕 스캔들 본질은 무엇인가
‘서울시교육감에 출마한 고승덕 씨(57)에 대해 고 씨의 딸 캔디 고 씨(Candy Koh․27)가 SNS에 올린 편지사건’을 ‘고승덕 스캔들(이하 고스캔들)’이라고 하자.
고스캔들은 6.4지방선거를 사흘 앞두고 터진 데다 언론과 온라인상에서 이슈로 다뤄지고 있기 때문에 선거 당락을 결정지을 최대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새다.
먼저 고스캔들을 간추려보자. 딸 캔디 고 씨는 지난달 3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울 시민에게(To the Citizens of Seoul)’란 제목으로 올린 영문 글에서 “고승덕 후보는 자신의 자녀의 교육에 참여하기는커녕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서울시교육감 후보로서 자질이 없다”며 “정확한 진실을 서울시민에게 알리기 위해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게 됐다”고 썼다.
딸이 아버지를 부정하는 글은 후폭풍이 거셌다. 편지사건 하루 만인 1일 오후 고 씨가 기자회견을 열어 해명했다. 아니, 해명해야만 했다고 하는 게 적확한 표현일 것 같다. 고 씨의 해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92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가정불화가 생겼다. 고 씨는 한국에서 생활하기를, 아내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98년 부부는 결별했다. 아내가 돌연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고 씨는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집안의 딸에게 자식의 양육권을 빼앗긴 아버지로서 많은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고 씨는 익히 알려진 대로 고(故)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둘째사위였다.
고 씨는 기자회견에서 캔디 고 씨의 편지사건을 ‘공작 정치’라고 했다. 서울시교육감 후보로 경쟁 중인 문용린 씨 측이 퍼뜨렸다는 소문과 함께 문 씨 일가와 박태준 회장 일가가 막역하다는 점을 들어.
그러자 캔디 고 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27살 성인이고 제 의사 결정을 할 능력이 있다”고 되받아쳤다. 이쯤 되면 ‘갈 때까지 간 것이고, 끝까지 가보자는 것’이다.
이제 본질을 짚어보자. 고스캔들의 본질은 여러 개일 수 있다. 우선 고 씨를 선거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 표피적 본질이다. 고스캔들을 접한 국민의 대다수는 이것만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본질은 하나여야 말이 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좀은 감 떨어지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의 일은 무 자르듯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일들이 태반이다. 고스캔들 뿐만 아니라 여타의 사건은 다양한 본질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또 다른 본질이 표피적 본질보다 실은 중요하지만 뇌리에 잘 잡히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지금 이 점을 주지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또 다른 본질이란 무엇인가. 부모와 자식 간의 도(道)와 예(禮)가 박살났다는 것이다.
고스캔들은 향후 우리사회에 ‘아주 나쁜 학습효과’를 잉태할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죄를 단죄하려드는 악습이 심심찮게 나타날 것이다. 그건 오로지 ‘캔디 고 효과’ 때문이다. 여론이 아버지 고 씨에게 나쁘게 흘러가고 있다. 캔디 고 씨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사례가 부녀지간에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 생각해 보자. 인간조직의 근간은 가정(家庭)이다. 물론 굴곡진 사연을 가진 가족은 부지기수다. 그러나 그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그것이 학습효과를 부추길 수 있는 사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사회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 이를 혹자는 사회가 변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무너지는 것이든, 변해가는 것이든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부모가 자식을 핍박하고, 자식이 부모를 괄시하는 풍토는 서구식 평등주의가 우리사회에 보편화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다.
나는 이 현상을 심히 우려한다. 터부와 금기는 예의와 도덕의 다른 이름이다.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리지 못하면 어떤 이의 말과 글이 아무리 논리정연해도 ‘모자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모자란 데는 약도 없다.
세 번째 짚히는 본질은 부녀간의 오해이다. 이건 순전히 캔디 고 씨의 오해일 확률이 높다. 캔디 고 씨가 태어난 해는 1987년이고, 한국에서 산 기간은 1991년부터 1998년이다. 캔디 고 씨가 아버지 고 씨와 헤어진 것은 고작 일곱 살 때였다.
이 세상에 부모의 삶을 오롯이 이해하는 자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매일 세 끼를 함께 먹으며 지내도 부모의 삶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부모 역시 자식의 삶을 전부 알 수는 없다. 다만 부모가 자식을 좀 더 이해할 뿐이다.
캔디 고 씨가 어린나이에 ‘남보다 못한 사람이 된’ 아버지 고 씨에 대해 적대감을 품었을 수는 있다. 그래도 공개적으로 아버지의 행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캔디 고 씨는 아버지 고 씨의 이 말에 주목하고, 가정사를 깊숙이 더 공부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재력과 권력을 가진 집안의 딸에게 자식의 양육권을 빼앗긴 아버지로서 많은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의 슬픔은 기실 컸을 것이다.
남자의 삶과 여자의 삶이 다른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아버지 고 씨 표현을 빌리자면 “고시3관왕으로 부러울 것 없는 사람처럼” 비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식들과 생이별을 했어야 했던 ‘대가’로 하늘로부터 받은 작은 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선물의 유효기간이 끝난 걸까. 나는 아버지를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몰아 부친 딸 고 씨보다 자식에게 일격을 당한 아버지 고 씨가 더 애처로워 보인다.
고스캔들은 잘 산다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그걸 생각해보라고 우리사회에 부추기고 있다. 부녀지간을 싼 안줏감으로 올릴 일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짚히는 본질은 이럼에도 불구하고 고승덕 씨는 서울시민에게 심판받겠다는 것이다. <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는 서양 최고의 전쟁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직접 전투를 지휘해 본 적이 없다. 그가 전쟁터 지휘관으로 승전보를 울렸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다른 경우로, 촉한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은 북벌을 6번 감행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 중 1차 북벌 때 성공의 기운이 감돌았지만 가산을 빼앗겨 실패했다. 가산은 그가 제일 신임했던 마속에게 맡겼다. 마속은 탁월한 내근 참모였지, 전투 지휘관은 못되었다.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베어버렸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여기서 나왔다.
인간은 누구라도 미흡한 점이 있기 마련이다. 가정경영이 형편없다고 해서 조직경영을 잘못하라는 법은 없다. 이제 공은 서울시민들에게 넘어갔다. 6월 4일 어떤 심판을 내릴 것인가.
/심보통20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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