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소명
소명(召命). 국어사전 뜻풀이는 두 개다.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명령'이란 뜻과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이란 뜻이다. 전자는 국가 통치의 개념이고 후자는 종교적 개념이다. 하나 '소명'이란 단어는 '의식'과 짝을 이뤄 '사명(使命)'으로 전방위로 사용되고 있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박근혜는 누구보다 일찍부터 강력하게 소명의식을 인지하고 살아왔다. 대통령 아버지를 둔 덕분이었을 것이다. 허망하게 보냈기에 '퍼스트레이디'로서 어머니의 헌신이 각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스물넷 박근혜의 말이다.
"크든 작든 간에,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땐 사명을 지니고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물질과 자기 자신만의 안위가 결코 제일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 이상의 숭고한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안락을 포기함으로써 얼마나 풍성하고 귀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어머니는) 몸소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한 사람의 고결한 희생과 노력이 얼마나 많은 씨앗을 뿌렸는가 하는 것도." /<육영수여사 중;1976>
그가 본 세상은 소시민의 세상보다 크고 깊었음이 분명하다. 태어날 때부터 그가 크고 깊었던 것보다 환경이 그를 키웠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 서거 후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일찍이 민심이반을 넘어 배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남이 되어버린 현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박근혜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했던 세상은 이전에 그가 보고 경험한 세상과는 차원이 달랐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사람을 점점 믿지 않게 되었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인간이 어찌 저럴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타자부정을 통해 시나브로 자아우월을 싹틔웠을 것이다. 그의 행동이 잘못되거나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아우월을 통해 대통령에 등극함으로써 용의 자식이었던 고로 용의 자식 값을 한 유일한 형제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아킬레스건은 소시민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DJ와 맞손을 잡으며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을 때부터, 그리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고배를 마신 뒤, 두 번째 도전만에 대통령 후보가 된 그에게 '용의 자식은 달라도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과 '에미 애비를 기상천외하게 잃은 것이 불쌍하다'는 동정론이 트위스트로 단단하게 결박되는 바람에 그의 결점을 심각하게 들여다 보지 않았다.
박근혜의 결점은 또 있다. 결혼생활을 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어른이 되는 길은 햇수가 가고 떡국을 먹는다고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진짜 어른은 결혼을 하고 남편과 가정경영을 맞추고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되어간다는 것은 전가의 보도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는 그런 경험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일거다. 국가 예산 절감 회의에서 세월호 참사에서 고인이 된 아이 부모의 간소한 장례를 '그렇게'라는 모범으로 드는 어처구니를 범했다. 국모(國母)로서도 경악할 말이지만, 한 소시민의 어머니로서도 쉽게 뱉을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가히 자아우월에 따른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그가 본 세상은 크고 깊고 넓다. 그건 부인할 수 없다. 그는 큰 사명을 지니고 살아왔다. 이 또한 부정하기 힘들다. 그것이 아비의 대업을 잇기 위함인지, 그저 큰 사명의 종착점이 대한민국 수반인지는 우리는 사실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있다. 기대감과 동정론의 실체와 박근혜의 소명의식이 잘못 배태되어 있다는 것이 배 사고 하나로 여지없이 드러났다.
대통령이라면 사고 초반에 사태를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승객들 목숨부터 무조건 구하라. 돈 걱정, 환경 탓 말고 무조건 구하라!"고 언명을 내리는 동시에 그것을 반드시 이뤄냈어야 옳다. 그것이 큰 소명을 가진 국부(國父)의 첫 번째 자질이다. 박근혜는 이번 사고로 그 첫 번째 자질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 되었다. 잘못된 관행, 구조, 제도, 습관을 탓하는 건 목숨을 살려놓고 난 뒤에 할 일이다. 최초의 판단과 오더(Order)를 잘못 내린 것이 대통령으로서 대단한 실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이걸 더 '큰 사명'이란 명분으로 덮는다면, 그건 대한민국의 절망이다.
우리는 이번에도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전 대통령과는 비할 바가 없는 과오다. 박근혜에게 한 표를 던짐으로써 나도 이 과오에 일조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참담하고, 죄스러울 따름이다. 나 역시 용의 자식이라 다를 것이란 확신에 가깝운 믿음보다 그가 가진 결점이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가를 냉철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그건 순전히 내 과실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도 끔찍한 상황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 외상후스트레스가 대한민국 곳곳에 끝간 데 모를 만큼 스며들 것이다. 이 원죄는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한다. 그걸 모른다면, 국민이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심보통 20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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