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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스토리텔링 비즈니스(심지훈 1979~)

# 스토리텔링 비즈니스

 가공하거나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를 (널리) 알리는 것쯤으로 정의할 수 있다. 어원적 정의를 내리자면, 영어 스토리(story·이야기)와 텔링(telling·말하기)의 합성어이니 우리말로는 ‘이야기하기’가 된다. 요즘 이 이야기하기가 돈이 된다고들 한다. 스토리텔링과 사업(business)이 한 세트로 뭇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유다. 관광 스토리텔링, 테마파크 스토리텔링, 인물 스토리텔링처럼 '… 스토리텔링'의 이면에는 팔 수 있는 것이란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판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관련 출판물에는 스토리텔링의 모범 사례로 가득하다. 하지만 꼭 책에서 찾아볼 필요는 없다.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다보면, ‘이게 바로 스토리텔링이다’는 사례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아는 사람은 좀체 만나기 힘들다. 스토리텔링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에 직접 참여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토리텔링 비즈니스는 거품이 많다. 여전히 척박하다. 개척해야 할 것들이 많다. 자칫 부동산 거품(bubble)같은 실체 없는 허상이 사회 곳곳에 침투, 허망한 꼴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스토리텔링은 누가 처음 사용했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다만 누군가는 말을 했고, 그것이 그럴싸하게 들렸을 것이다. 이제 왜, 누가, 언제, 어떻게 스토리텔링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됐을까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스토리텔링은 돈이 된다는 관념(觀念)이 많은 이들에게 상식(常識)이 됐고, 이런 식의 사고는 여전히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까닭에 스토리텔링의 개념부터 새로이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스토리텔링은 이미 돈과 직결돼 있고, 이는 스토리텔링이 돈을 쫓을 것인가, 돈이 스토리텔링을 쫓아오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와 직결돼 있다. 전자라면 쫓는 자가 돈의 노예가 될 것은 불보듯 뻔하다. 후자라면 신바람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리텔링 비즈니스는 단순히 이야기 사업이 아니다. 단순 이야기는 팔리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가 곧 사업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사업이 될 수 있는 이야기만 스토리텔링 비즈니스에 포함된다. 이렇게 볼 때 스토리텔링은 형상화 작업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이란 네모상자를 떠올려보자. ‘이 상자에 무엇을 담을 것을 것인가’. 응당 이것이야말로 스토리텔링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스토리텔링 상자는 인간에게 불행과 재앙을 안겨줬다는 판도라의 상자여야 한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파괴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존 것을 뒤집고, 그 누군가가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의 이야기가 스토리텔링 상자 안에 들어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심각해지지는 말라. 스토리텔링의 영역은 창작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있는 것을 재가공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말했듯이 이야기는 도처에 늘려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가공해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가 스토리텔링 비즈니스의 핵심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이야기로 이윤을 창출하는 방식은 의외로 간명할 수도 있다. 스토리텔링 상자에 한글고문서를 담는다고 생각해 보자. 우선 원재료인 한글고문서의 수집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현대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상자에 콘텐츠를 담는다는 의미에서 스토리텔링은 콘텐츠와 유의어다. 스토리텔링이 이야기하기라면 콘텐츠텔링은 내용물말하기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말하기의 영역에 이야기가 수반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던가.

자, 이제 스토리텔링 상자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상자에 담길 내용물은 주지하다시피 팔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야기가 아무리 명문(名文)이라한들 쓸모없는 이야기하기에 불과하다.

/심지훈 2010.2.26 쓴 것을, 2014.9.21 새로 발견해 옮겨 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