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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구설에 오른 <새 봄>, 에로티시즘을 의도했다?

#구설에 오른 <새 봄>, 에로티시즘을 의도했다?

공교롭게도 엊그제 쓴 시 <새 봄>이 여러 분들의 구설에 올랐다. 작가는 무릇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작가의 숙명이다. <새 봄>은 이은상(1903~82) 선생의 명시 <봄 처녀>를 감상하고, 마당으로 나갔다가 발견한 쪽빛 노루귀 한 무리(?)를 카메라에 담고 지은 것이다. 


새 봄(심보통 1979~)


새 봄이 왔어요

언제나처럼 노루귀가 

제일 먼저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죠


하루 만에

한 녀석의 

꽃대가 쫑긋 섰어요

노루귀의 호기탱천(豪氣撑天)이어요


봄이 온대서 노루귀를 쉬이 볼 순 없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김천과 영동의 경계지점을 가르는 백두대간 등산로에서 볼 수 있다. 그것도 5월중순 경에나 등산객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도우미로 만개한다. 

이런 노루귀는 굳이 성별을 따지면 남성보다 여성에 가깝다. 하얀 아이도 있고, 분홍 아이도 있고, 쪽빛 아이도 있다. 그 중 노루귀 계의 여왕은 진보랏빛 아이다. 대개가 하얀 노루귀여서 노루귀 밭(?)에 들어서면 하얀 노루귀는 귀해 보이지 않는다. 쪽빛 노루귀는 분홍 노루귀보다 맵씨가 빠진다. 그런데 분홍 노루귀를 보다 진보라 노루귀를 보면 단숨에 시선이 빼앗긴다.

모든 노루귀는 여리디여리다. 고 가느다란 꽃대에 큰바위 얼굴 같은 꽃을 틔운다. 하나의 꽃대에 8~9개 꽃잎을 맺고 화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꽃대 주변엔 외롭지 말자는 서로의 약속인지 2~4개의 꽃대가 항시 같이 피어난다. 어떤 놈은 조금 일찍 피고, 어떤 놈은 조금 늦게 핀다. 그렇게 형아우가 되고, 언니동생이 된다.

문제의 시 <새 봄>에 함께 실린 노루귀도 하나가 먼저 피고, 둘이 필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노루귀를 보고 태어난 지 돌도 안 된 내 조카 은솔이를 떠올렸다. 뽀얗고,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 같은 노루귀! 그런데 생명 있는 것은 제 각기 질기다. 억척같다. 살기 위해 버틴다. 그러면서 자란다. 나는 그걸 <새 봄>에 담고 싶었다. 요 조막만한 노루귀도 새 봄에는 힘차게 일어선다. 그러니 여러분도 힘내시라!

그런 <새 봄>이 구설에 올랐다. <새 봄>에서 에로티시즘(eroticism)이 읽힌다는 것이다. 문제적 표현은 '호기탱천이어요'다. 왠지 야하다는 것이다. 뜨악했다. 무슨 그런 경박한 소릴!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시를 읽고,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진과 '호기탱천이어요'가 매치되면 능히 에로티시즘이 읽힐 법 했다. 공교롭게도 노루귀 무리의 모습이 마치 남성의 그것과 닮았다. 꽃대는 음경을, 두 망울은 음낭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새 봄, 만발한 노루귀라니! 남성의 절정을 연상시킨다. 

뭇사람들은 텍스트 속에서 콘텍스트를 생산한다. <새 봄>의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를 낳는 것은 애오라지 독자의 몫이다. 오늘의 교훈 둘. 작가는 따로 있으되 평론가는 따로 없다. 작가는 의도는 할 수 있으되, 해석을 강요할 순 없다.

끝으로 사진과 함께 시를 다시 음미해 보자. 



새 봄(심보통 1979~)


새 봄이 왔어요

언제나처럼 노루귀가 

제일 먼저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죠


하루 만에

한 녀석의 

꽃대가 쫑긋 섰어요

노루귀의 호기탱천(豪氣撑天)이어요


여성성이 푹 담긴 <새 봄>이 언어적 전회(轉回)에 한방 먹은 뒤, 남성성이 짙은 <새 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어쨌든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우야든동 새 봄은 새 봄이고, <새 봄>은 새 봄의 찬미다! 

독자제현께 청하나니, 부디 어여삐 봐 주시라.

/심보통 2014.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