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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이 만난 사람

[인터뷰打] 윤상철잎새버섯연구소 윤상철 대표


윤 대표는 영남대 산학협력단이 보유한 잎새버섯 관련 특허를 이전받았다. 그 특허기술을 바탕으로 그리포란을 개발했다. 윤 대표 덕을 본 사람들은 그를 의인(義人)’이라고 부른다. 윤 대표가 만든 제품을 장기복용하고 암을 말끔히 치유한 사람들은 그를 기적의 손이라고도 부른다. 그에게는 하나의 바람과 하나의 꿈이 남아 있다


·사진=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

 

#1. 아버지 어머니 모두 으로 보낸 기막힌 운명

저마다 우연처럼 다가와 운명이 돼버린 일들이 있다. 윤상철잎새버섯연구소 윤상철(54) 대표에게는 잎새버섯이 그랬다.

그는 1990년대초 부모를 모두 암으로 떠나보냈다. 병원진단을 받았을 땐 이미 속수무책이었다. 아버지가 위암말기 판정을 받고 얼마 안 돼 어머니까지 대장암말기 판정을 받았다. 부모는 그렇게 4개월 만에 저 세상 사람이 됐다. 윤 대표는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냐며 하늘에 대고 분노의 포악질을 해댔다. 그럴수록 몸만 망가졌다. 마음의 안정을 찾아준 건 시간이었다. 과거의 기억은 또 다른 과거가 되어가는 현재의 일들로 채워졌다. 새로운 기억들이 옛 기억을 꼭꼭 누르면 누를수록 과거의 일들은 흐릿해졌고, 무뎌졌다. 그러는 사이 괴롭고 아팠던 마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가뿐해졌다. ‘아이고, 이 사람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하던 동네어른들 말씀은 뭔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리 되어가는 듯했다.

황망하게 부모를 떠나보낸 지 6년이 흐른 1998년의 어느 날, 출장길에 지리산휴게소에서 우연히 진주의 한 버섯연구가를 만났다. 윤 대표는 당시에도 야생송이버섯을 재배하고 있었기에 반색했다. 이런저런 버섯이야기를 나누던 중 버섯연구가는 윤 대표에게 어떤 신뢰감이 일었던지 대뜸 잎새버섯을 재배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미국, 일본 등에선 잎새버섯이 암 환자 치료에 탁월하다고 입증돼 병원에서도 쓰이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우리나라도 잎새버섯이 크게 쓰일 날이 올 것이라면서.

윤 대표는 그와의 짧은 만남 뒤, 자꾸만 돌아가신 부모 얼굴이 아른거렸다. 만감이 교차했다.

암만, 버섯이 암 예방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지. 그렇다고 암을 치료한다는 말은 내가 일찍이 들어 본 바가 없어. 만약 암을 치료하는 데 그렇게 탁월한 버섯을 내 진즉에 알았다면, 부모님을 그리 허망하게 보냈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 윤 대표는 한편으로는 억울했고 한편으로는 어떤 오기가 생겼다.

암만, 내가 대학교수나 의사는 아니어도 현장의 재배 노하우는 나도 둘째가라면 서럽지. 내가 키운 잎새버섯으로 암 환자들이 진짜 효험을 보게 된다면, 하늘에 계신 부모님도 기뻐하실 거야.’

윤 대표에겐 이 결심이 우연에서 운명으로 선회한 분기점이었다.

 

#2. 시련-성공-특허-상품출시어느덧 10, ! 어머니

우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윤 대표의 가슴에는 시나브로 사명감(使命感)이 들어앉았다. 꼭 현대의학으로만 사람 목숨을 살리란 법이 어디 있나. 암말기 환자는 현대의학도 어쩌지 못한다. 아버지 어머니도 그래서 속절없이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곧 진주의 버섯연구가를 찾아갔다. 잎새버섯 재배법을 배워 종균을 사가지고 왔다. 버섯연구가는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윤 대표는 이미 나라를 구한 것처럼 뿌듯했다. 자신만만했다. 하나 결과는 참담했다. 첫 해 2만병 중 수매율이 10%도 안 됐다. 유독 균에 잘 감염됐다.

지인들은 기어이 한 마디씩 보탰다.

그래, 내가 뭐랬나. 누구는 큰 뜻을 갖고 싶지 않아 안 갖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실패할 걸 뻔히 알면서 누가 달려들겠나. 그래가, 우리가 극구 말린 거 아닌가.”

윤 대표는 달리 생각됐다. 여기서 포기하면 왠지 부모님께 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잎새버섯과 동거에 들어갔다. 놈의 생리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정성을 기울인 만큼 수매율이 나아지긴 했다. 하나 여전히 본전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윤 대표가 잎새버섯과 씨름하고 있는 사이 국내에서 잎새버섯의 항암효과가 입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잎새버섯 인지도가 올라가면 갈수록 윤 대표를 찾는 이들도 늘어갔다. 대부분 병원에서도 손을 놓은 암말기 환자와 그 가족이었다.

2005년부터는 수요를 맞추지 못할 만큼 잎새버섯에 대한 세간의 믿음이 강해졌다. 윤 대표는 이 추세대로라면 현장이 아닌 과학적인 기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윤 대표는 영남대 산학협력단이 보유한 잎새버섯 관련 특허를 이전받았다.

그 특허기술을 바탕으로 그리포란을 개발했다. 항암작용에 뛰어난 것으로 판명된 베타글루칸만 추출한 엑기스 제품과 그것을 다른 비타민류와 섞어 만든 환 제품을 출시했다. 2년 뒤인 201010, 드디어 잎새버섯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잎새버섯 입문 12년만이었다. 윤 대표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니, 절로 춤이 춰졌다.

, 어머니!”

잎새버섯은 춤 버섯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일대에서 자연산 잎새버섯이 나던 시절에 잎새버섯을 발견하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췄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얼마나 귀했던지 고을수령이 생잎새버섯 무게만큼 금으로 바꿔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열쇠는 적정온도 유지에 있었다. 잎새버섯이 균에 쉬이 감염되는 이유는 적정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20~25도가 적정온도인데, 20도 밑으로 떨어지면 시들어죽고, 25도가 넘어가면 균에 감염돼 죽는 것이었다.

이게 꼭 100일도 안 된 애기 키우는 것 같아요. 왜 애기들은 기저귀를 제 때 갈아주지 않으면 엉덩이가 금세 헐잖아요. 얼마나 민감한지 적정온도 밑으로 내려가거나 위로 올라가면 그걸로 농사는 끝났다고 봐야죠.”

남들이 뭐라던 잎새버섯에 미쳐 산 지 내년이면 꼭 20년이다. 버섯연구가의 예언 같은 예상도 느릴 뿐 맞아떨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3. “기초수급대상자 중 암 걸린 이웃에겐 그저 드립니다

윤 대표는 버섯 대량생산에 성공한 후 원칙 하나를 세웠다.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 암 진단 확인서를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제품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것. 물량이 달려 제때 공급하지 못하는 애로는 해결됐지만, 여전히 가격이 비싸 사정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지금까지 대구에서만 14명이 그 원칙으로 혜택을 봤다.

돌이켜보면 시련만큼이나 보람도 컸다. 하지만 미국, 일본에선 잎새버섯 추출물이 항암보조제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식품에 머물러 있다. 이게 윤 대표를 시시때때로 괴롭힌다.

현수막에 특허 사실을 그대로 게시해 놓았는데, 이상한 약장수로 오인해 관계당국에 신고되는 경우가 1년에 10건 이상 발생합니다. 그럴 때면 힘이 빠지죠. 법과 현실 간의 괴리랄까요. 그런데 실오라기라도 붙잡고 싶어 찾아오는 초췌한 환자들을 어떻게 그냥 돌려보냅니까. 그들이 직접 섭취하고 병원에서도 못 고친 병을 고쳤다면서 은인이라고 인사해 올 땐, 자꾸만 어머니 얼굴이 떠오릅니다. 정성을 더 하게 되죠.”


#4. 나의 꿈, 나의 바람

윤 대표 덕을 본 사람들은 그를 의인(義人)’이라고 부른다. 윤 대표가 만든 제품을 장기복용하고 암을 말끔히 치유한 사람들은 그를 기적의 손이라고도 부른다.

그에게는 하나의 바람과 하나의 꿈이 남아 있다.

바람은 정부지원으로 잎새버섯 단가가 낮아지는 것이다. 재배기술은 많이 향상되었지만, 판로가 막막하다는 이유로 거개의 농가가 관심을 안 갖는다. 항암효과도 항암효과지만, 희소가치 때문에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 잎새버섯이 대중음식이 되려면 정부지원이 불가피하다는 게 윤 대표의 생각이다.

꿈은 암 환자들을 위한 요양소를 만들어 잎새버섯 요리를 원 없이 제공하는 것이다. 윤 대표는 그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 투병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암말기 환자들은 정말 갈 곳이 없다는 걸 체감했다.

그의 꿈과 바람은 또 10년은 지켜봐야 알 일일지 모른다. 19년을 묵묵히 걸어왔기에 그 힘으로 10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마음속엔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그의 황소 같은 큰 두 눈엔 아버지 어머니 같은 암 환자들이 너무나도 잘 보인다. ‘의인이 지칠 겨를은 아직은, 없다.


*이 글은 대구한국일보가 발행하는 월간문화잡지 <엠플러스한국> 3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