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묘한 인연


#묘한 인연
나는 언젠가부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 인연의 연결고리는 무엇이었을까? 이 인연의 끝은 어디일까? 


사람과의 인연이긴 한데, 죽은 사람과의 인연이어서 궁금증이 더해 간다.

그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어제오늘 본격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인터뷰 대상자 작업을 하면서 문득문득 든 생각도 같다.

'참 묘한 인연인데...'

내가 '독재자 박정희'를 마주한 건 2006년 5.31일 지방선거를 기해서였다. 

나는 수습기자 신문으로 지방선거 현장을 생애 처음으로 체험했다. 

그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전국을 돌며 지방유세를 지원하러 다녔다. 

당시 지방선거 분위기는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비우호적이었다.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텃밭이었던 대구에서조차 '이번에는 민주당에서 최소 1명은 당선돼야 한다'는 여론이 드셌다. 

대구 동구을 후보로 나섰던 민주당 이강철 후보(당시 시민사회수석비서관)는 한나라당 유승민 후보의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이강철 후보는 '대구의 노무현 복심'으로 불렸다. 그만큼 대통령 프리미엄을 얻어 선거에 나섰다.


이는 흡사 지난 19대 국회의원 지방선거에서 대구 수성갑에서 맞붙었던 이한구 후보(새누리당 원내대표)와 김부겸 후보간 접전(?)의 예고편 같았다.(물론 그전에 유시민씨 사례도 있다.)

그만큼 보수세력의 메카였던 대구에서도 '민주주의 다양성 원칙'이 먹혀들 것만 같았다.


하나 보수의 성城은 견고했고, 막강했다. 아니, 다양성 원칙을 운운할 동력이 상실되었다.

대전 유세에서 박근혜 대표가 '면도칼 테러'를 당한 것이다.

여론은 급반전됐다. 뿔뿔이 흩어졌던 보수층 표심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부동층도 보수쪽으로 움직였다.


지레 선거를 포기했고, 그래서 유세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친박연대'가 일거에 선거정국의 핵으로 떠올랐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자들이 '친박연대' 띠 하나 두르고 국회에 입성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렇게 '면도칼 테러'는 한나라당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보다 더 값진 승리는 태생적 뿌리가 불분명했던 숱한 친박연대(후보들)의 그것이었다.

현대정치사에서 기억될 만한 그 비극적이면서도 짜릿한 승리의 현장, 개표소에서 나는 야멸찬 시민들 소리를 들었다.

"독재자의 딸이 또 한 번 사고쳤군!"

그날, 내 귀는 '독재자의 딸'을 옭아매지 않았다. '독재자'만 묶었다. 

그렇게 나는 '독재자 박정희'를 만났다. 스물여덟의 나이였다.

그리고 서른에 나는 인간 박정희를 흠모하게 되었고, 대통령 박정희를 존경하게 되었다.

단순했던 것 같다. 박정희와의 조우 말이다.

'사람들은 왜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할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밤송이 같은 까칠까칠한 수습기자로선 당연한 의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박정희를 만났고,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른셋에 <박정희 스토리텔링>을 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해냈다.

서른넷에 박정희가 기획한 대한민국 근대화운동의 본산인 <경북 청도 새마을운동 발상지 스토리텔링>을 할 기회를 얻었고, 역시 해냈다.



서른다섯이 된 나는, 이제 인간 박정희와 대통령 박정희 재평가 작업에 나선다. 
이 기막힌 인연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인간 심지훈이 대통령 박정희와 조우遭遇한 것인가.대통령 박정희가 인간 심지훈을 낙점落點한 것인가.


나는 춘삼월이 오면 박정희 시대 인물들 인터뷰 대장정을 떠난다.
그날을 위해 18일 첫 미팅을 갖는다. 

*조우遭遇= 1.신하가 뜻에 맞는 임금을 만남 2.우연히 서로 만남




Story Plus
나는 인간 박정희의 비범함을 장차 장인이 될 육종관과 정면대결 하는 처세술에서 처음 보았다. 

충북 옥천의 대부호였던 육종관은 그중 아꼈던 육영수와 박정희의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전쟁통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군인에게 시집보낸다는 것이 육종관의 입장에선 납득이 안 갔다.

설득을 하다하다 안 되겠다 싶었던 박정희는 아주 당돌한 행동을 취한다.

등을 돌리고 앉았던 육종관 뒤에서 박정희는 방 벽에 등을 기댄 채 한쪽 다리는 쭉펴고, 다른 다리는 오무려 올린 뒤, 지포라이터를 빼들곤 한손을 다리에 걸쳐 '딸칵 딸칵' 소리를 낸 것이다.

고개를 돌린 육종관은 뜨악해 했다. 

육종관은 노발대발했지만, 박정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장인 어른이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육종관은 항복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와 육영수는 대구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육종관은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웨딩사진 속 육영수 얼굴이 퉁퉁 부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