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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도로 야만, 다시 미개

@2016.6.12 심지훈


#도로 야만, 다시 미개
옷을 발가벗고, 문명을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해야 할까 보다. 우리 사회 말이다. 이 인류 말이다. 정말이지 사회 제 분야가 '발달' '진보'라는 이름으로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간성과 인간애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다. 상식이 먹혀들지 않고 있다. 배운 값을 못하고 있다.


이제야 우리는 실체를 조금씩 확인해 가고 있다. 무학력 저학력이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가정에서 배운 바가 없기 때문에 그리도 이기적이고, 몰상식하고, 무식하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학자는 앞으로 인류가 망하지 않고, 전쟁도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초고도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옛날처럼 이해관계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놨다. 한마디로 '제 팔 제 흔들기 바쁜 세상'에선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는 희생이란 기적과 같다는 말이다.


백 번 수긍 간다. 하나 중요한 것은 전쟁이나 인류멸망이 일어나고 초래되지 않는다고 다행인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 부모가 내 아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인간사회는 극도로 불편부당한 채로 지내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때부터 이 사회는 "어른이 없다"는 성토가 쏟아져 나왔다. 그래선지 요즘엔 <어쩌다 어른>이란 인문학 강좌 프로가 인기란다. 어쩌다가 어른이 됐는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것인지, 어른이라고 해봐야 애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인지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인지, 나는 본 적이 없어 알지 못한다.


하나 어른이든 애든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제 기준에서 생각하고, 제 편의대로 살아가면서 그게 자유고 평등이고 심지어 정의라고 생각하니, 사회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는 이 책임을 국가지도자를 비롯해 고위층에 묻곤 했다. 이 원망과 질책의 전제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고전에서 비롯된 게 틀림없다.


하나 이제쯤은 애당초 전제가 틀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방 끈이 길다고, 고위직에 앉았다고 인격적으로 훌륭할 것이란 심정적 증거는 현실에서 거짓임이 너무 잦게 그리고 빠르게 명명백백해지고 있다.


국회의원을 '구케의원'으로 비꼬고, 공공연히 '인간쓰레기 집단'이라고 폄훼하는 것은 모두가 경험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그 경험칙을 제대로 들여다 볼 때가 됐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권위가, 학교에서는 선생의 권위가, 직장에서는 사장의 권위가 무너졌다.


이 판국에 아직도 사회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운운하는 건, 순진무구하거나 세상 구동원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자들이 윗것들이 오래전에 저들 편의를 위해 짜놓은 그물망 안에 걸려든지도 모르고 아직도 히죽대는 형국이다.


이러니 '저녁 있는 삶'이니 '아름다운 삶'이니 '원조국의 의무'니 하는 건 한마디로 개떡같은 소리다.


나는 우리 사회가 상식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갖는 사람이다.


제 편한 걸, 제가 좋아하는 걸, 제게 유리한 걸 정의라고 착각하는 사고라도 벗어던졌으면 좋겠다. 이 기준만 분명히 세우고 처신해도 우리 사회는 이렇게 야만스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 기원이자 근대화의 기원이 결과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동학'이 1860년에 탄생할 때, 그걸 만든 수운 최제우는 그랬다.


"이건 인간세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개벽이 와야 한다. 절망은 위정자의 과실에만 있지 않다. 그 위정자와 한패가 되어 놀아난 서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나는 지금, 최제우의 절박한 심정으로 말한다.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 기독교는 그 신이 저 하늘에 있다지만, 동학은 신이 남녀노소할 것 없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는 각자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행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직위의 고하를 따져 누구는 갑이 되고, 누구는 을이 되서는 안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귀신보다 무서운 권력자들을 권귀(權貴)라 했고, 그 밑에 빌붙어 먹는 자들을 활리(猾吏교활한 관리)라 했다. 권귀와 활리에게 아첨하며 백성의 등에 칼을 꽂는 간사한 백성을 간맹(奸氓)이라 했다.


실은 권귀와 활리보다 더 나쁘고 무서운 게 간맹이다. 조선왕조는 망했어도 여적 간맹은 유전되어 판을 친다. 비극이, 이런 비극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상식조차 요구할 수 없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맞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가 아닌.)

/심지훈 대구한국일보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2016.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