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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프리즘

[미디어窓] 닭 수난시대(엠플러스한국 3월호)


시사에세이


닭 수난시대


/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


나는 시골서 나고 자라, 시골 초등학교를 다녔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아직은 찬바람이 볼을 스치던 3, 수업을 마치고 교정을 나서면 노란 병아리장수 아저씨가 한자리 차지하고 삐약삐약울어대는 앙증맞은 병아리를 팔곤 했다. 친구들은 금세 아저씨 주변으로, 아니 병아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한 마리 50, 두 마리 100원하는 병아리는 친구들에겐 언감생심이었다. 하루용돈이 많아야 30원이던 시절로, 거개가 용돈이란 걸 모르고 살던 때였다. 그나마 집안 형편이 좀 나았던 나는 큰 마음먹고 병아리를 한 마리 사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병아리는 집에만 오면 힘이 쭉 빠져 비실대다 죽기 일쑤였다. 그런 경험이 몇 해 반복되면서 절로 알게 됐다. 똥구멍이 막혀 똥을 눌 수 없거나, 눈이 하나 없는 외눈박이거나, 다리를 절룩거리는 등 선천성 장애가 있는 병아리들을 동심(童心)의 우리에게 병아리장수 아저씨는 판 것이었다.

다시 봄, 병아리장수 아저씨는 어김없이 우리 학교를, 아니 우리를 찾아왔다. 나는 이번에는 아저씨가 골라주는 병아리 대신 내가 직접 골라보기로 했다. 똥구멍도 살펴보고, 다리 상태, 눈 상태도 매의 눈으로 살폈다. 무엇보다 손으로 쥐었을 때 강하게 저항하는 녀석으로 낙점했다. 요행인지, 어린 나에게 선구안이 있었던지 그 녀석은 하루를 살고, 일주일을 살고, 한 달을 살고, 어느새 알까지 낳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그 녀석이 마당에 낳은 달걀을 찾느라 여기저기 보물찾기하듯 한 경험은 여적 생생하다. 고 귀여운 병아리가 자라 매일 계란 2~3개를 내어주니 무척 신기하고 고마웠다. 헌데 온 마당이 닭똥천지가 되면서 골칫거리가 돼버렸다.

그러던 햇살 찬란한 5월의 어느 날 아침, 그 녀석은 처참한 모습으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간밤에 날짐승의 공격으로 잔인한 최후를 맞았던 거였다. 건강하게 자라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준 그 녀석을 볕살 잘 드는 곳에 묻어주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병아리를 키우지 않겠노라고.

지난 설날 아침, 티브이 뉴스에선 매년 겨울이면 연례행사가 돼버린 조류 인플루엔자(AI)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고향집 마당을 산책하다 누님 방 앞에 선 동백나무에 이르러 온 마당을 활개치던 그 녀석이 생각났다. 녀석은 주로 동백나무 아래에 알을 깠다. 그땐 동백나무 주변으로 대숲이 있었고, 대숲을 미로 삼아 드나들며 신선한 유정란을 생산해 준 것이다.

설 일주일 뒤엔 이런 보도가 나왔다.

9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1116일 전남 해남과 충북 음성에서 AI 최초 신고가 접수된 이후 이날까지 국내 가금류 농가 사육 마릿수의 20% 정도인 3312만 마리가 살처분됐다. 과거 AI 최대 피해로 기록됐던 20142015517일간 살처분된 1937만 마리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다.”(연합뉴스, 2017.2.9.일자 보도)

설상가상으로 같은 날 한국일보는 구제역 전국 확산 가능성을 언급하며 수도권도 뚫렸다고 적시했다.

지난 5일 충북 보은군에서 발생한 올해 첫 구제역 바이러스가 나흘 만에 경기 북부까지 북상했다. 경기 연천군은 구제역이 처음 신고된 충북 보은군과 거리상 200가량 떨어진 최북단 지역이다. 구제역 두 번째 발생 지역인 전북 정읍시까지의 거리도 300가까이 된다.”(한국일보, 2017.2.9.일자 1)

AI에 구제역까지 전호후랑이다. 닭에 이어 소, 소에 이어 돼지까지 판판이 죽어나갈 판이다. 대체 얼마나 더 죽어나가야 인간들 욕심에 제동이 걸릴까.


*이 글은 대구한국일보가 발행하는 월간문화잡지 <엠플러스한국> 3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