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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에서 본 한양

[심지훈 문화칼럼] 탄핵 단상

@2012.4.3 공주


#탄핵 단상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선고를 실시간으로 지켜본 뒤, 필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내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결국 인용이 되었네. 오늘은 우리 쮸디(아이 태명)’에게 참 미안하고 부끄러운 날이다.” 아내는 침통하게 답했다. “그래, 그렇네.”


필자가 보기에 여타 이유를 떠나 18대 대통령 박근혜는 헌법 수호 의지가 없는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파면됐다. 헌재결정문은 누가 보더라도 명료했다. 뭇 사람들은 대통령 탄핵을 두고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했다. 축배를 들었다. 과연 민주주의의 승리일까.


이번 탄핵 인용은 본질적으로 정치의 승리이다. 이건 마치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자유 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라며 불편한 진실을 꼬집는 족집게 경제학자장하준의 지적과 같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개입하여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에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지시하면 자원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장하준은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 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라고 갈파한다.


이를 탄핵 인용 틀에 비추어 보면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쪽은 전자에 해당하고, ‘정치의 승리라는 쪽은 후자에 해당한다. 이는 촛불집회 진영이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태극기집회 쪽이 민주주의의 말살이라고 맞불 놓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각이다.


이 시각의 핵심은 봉합이다. 정치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음을 가정한다. 정치를 두고 흔히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언제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탄핵 인용이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하는 쪽은 결과적으로 그런 주장을 펼칠 수는 있다. 그건 표현의 자유로써 용인되어야 마땅하다. 하나 그것이 두루 공감대를 얻으려면 적어도 두 가지는 충족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절차적 민주주의 준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51.6%의 국민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모든 국민은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고 설파했다. 무능한 대통령도, 잔인한 대통령도, 형편없는 대통령도 국민이 뽑는다는 말이다. 대통령이 문제가 있다면 퇴임 후 과오를 따져 죄를 묻는 것이야말로 성숙된 민주사회 국민의 자세일 것이다.


두 번째는 어른에 대한 이해 정도다. 이건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이 있다. ‘어르신들로 집약되는 태극기집회의 진영을 수구꼴통이라고 몰아붙이기 전에 그들의 삶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를 겪었으며, 다수는 청소년기 때 한국전쟁에 참여해 조국을 지켰다. 그 후 4.19를 경험했으며, 70년대 새마을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80년대 민주화운동도 지켜봤으며 6.29선언도 목도했다. 그 과정에서 하야하는 대통령도, 총살당한 대통령도, 감옥가는 대통령도, 자살하는 대통령도 봤다. 우리 지난(至難)한 현대사를 정통으로 지나온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이 나라를 지키고 일으킨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그들을 적으로 상정하는 건 옳지 않다.


지금 이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표현되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사건은 머지않아 제로섬(zero-sum) 게임이었다고 판명날 것이다. 그런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0’만 공허하게 울려 퍼질 것이다. 하나 정치적 승리라고 인식한다면, 상대를 인정하는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정치는 어느 누가 일방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정치적 삶을 꾸려나갈 것인가. 어떤 사회현상이 지속되든 이 점은 불변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심보통 2017.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