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우리나라 정치 이야기를 제하고 나면 최근 뉴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만원 권 지폐의 가치가 경제 규모의 거대화에 비해 크게 떨어지면서 십 만원 권 수표가 과거 지폐 단위의 최고 단위였던 만원권을 대신한다. 그에 따라 더 큰 단위 화폐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는 기사다.
이와 비슷한 기사를 하나 찾았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60년대 경제 사정은 오늘날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런 면에서 그 시절의 소박함이 절실히 느껴졌다. 내 잔잔한 미소는 옛 사람들에 대한, 우리 어버이들에 대한 동경에서인지도 모른다. 그 어렵던 보릿고개 시절에도 입에 풀칠하는 것에 감사하며 오순도순 살았을 우리 어버이들의 절약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지 않겠는가도 새삼스레 생각하게 하는 기사였다.
오늘날은 만원 권 지폐의 가치가 하락하여 그에 따른 더 큰 단위 화폐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더 큰 화폐 발행시 장단점은 무엇인가를 보도하는데, 60년대에는 그 시절 나름대로 경제 규모의 거대화와는 상관없이 우리들 할머니들이 옥이야 금이야 아끼던 10원짜리와 50원짜리, 100원 짜리들의 수난 시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은 1968년 11월 29일 신아일보에 <거스름 짜증 유통에 대한 마찰. 권종 균형으로 시민생활 불편 없어야>란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요지다.
기사는 출근시간 '택시 속에서'란 상황 설정을 시작으로 택시기사와 손님과의 대화를 담고 있는데 이런 식이다.
운전사 "100원짜리 없어요?"
승객 "없는데요."
운전사 "잔돈으로 내요! 잔돈으로."
승객 "500짜리 밖에 없는 걸 어떡합니까?"
운전사 "에잇참. 다른 손님 요금 먼저 내시죠."
승객 "미안합니다(?)"
이렇게 대화로 시작된 기사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단박에는 기사라 보기에는 뭐하다. 하지만 그 아래 본격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써내려 간 기사의 골자는 이렇다.
'1억 원의 돈을 찍는데 100원짜리로 찍으면 100만 장인데 500원짜리로는 20만 장이다. 종이나 잉크, 인건비 같은 생산단가는 비슷하다. 조폐공사의 대 한은 납품가격은 500원짜리 한 장이 2원 60전, 100원 한 장이 1원 88전. 그러니까 1억 원을 500원으로 전부 찍어내면 비용이 52만 원, 100원짜리로는 188만 원이니 3배 이상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글로 봤을 때, 일찌감치 한국은행은 100원짜리보다는 500원짜리를 더 많이 발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시중에 유통되는 100원짜리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인데, 기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화폐의 최종 수요자는 주부요, 소시민이요, 생활인이다. 은행은 매개체일 뿐이다. 이 경제생활 주체들 사이에서 돈은 마찰 없이 유통돼야 기능을 다한다. 그리고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거스름돈의 부족이 없는 권종 균형이고 다른 하나가 화폐 품질이다.'
그리고는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다.
'권종정책은 정부 재정금융정책의 지엽이 아니라 뿌리요. 시초가 아닐까?'
요즈음은 가진 자들의 횡포로 소시민들이 힘들어하는데, 60년에는 화폐 제조 과정에서 소비되는 비용에 따른 권종 불균형에 따라서 소시민들이 힘들어하는 형국이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돈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은 매 한 가지 인가 보다.
지금까지 돈에 관련된 어제오늘의 기사를 인용해 보았다.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신문을 뒤척이다 신문 하단 광고 면에서 '제9회 영남일보 책읽기상 독서 감상문 공모합니다'를 보게 되었다. 방학을 시작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대학생 국토대장정'에 참가했던 나는 그렇게 황금같은 방학 시간 한 달을 보냈고, 8월 들어서는 곧 바로 영어 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나갈 때였다.
늘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바쁜 일상에서 독서 감상문 공모는 자신에게 또 다른 변화를 주고 싶다는 충동을 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추천도서 중에는 내가 평소 관심 갖던 신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도 있었으니 독후감 쓰기 동기 유발은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고, 또한 내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로 생각되었다.
영남일보에서 추천한 대학생 추천 도서 20권 중에서 단연 '옛날 신문을 읽었다(1950∼2002)'가 내 눈에 띠였던 것은 순전히 평소 신문 스크랩을 즐겨 하던 습관 탓에서 였다. 내가 신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내 작고도 귀중한 자산인 스크랩 노트를 보건대 1998년 2월 12일자(영남일보)에 실린 '논리로 배우는 한자공부 이름풀이'(매주 목요일마다 기획 연재)를 처음으로 스크랩을 시작했으니 고 3때부터이다.
그 당시 한자 공부에 열중했던 터라 매주 목요일에 연재되었던 '한자공부 이름풀이'를 열심히 스크랩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다음으로 스크랩된 것은 이 역시 한자 관련 기사로 같은 해 2월 14일자(영남일보) 신문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현대사회와 고사성어'란 코너에는 98년 IMF당시 '금 모으기 운동에 일부 부유층 외면 아쉬워'를 골자로 한 양포지구(楊布之狗) - '겉이 바뀐다고 속까지 바뀔까'를 절묘하게 풀이해 내고 있다.
이렇게 하나 둘씩 처음에는 한자 관련 기사를 스크랩 해 오다 신문 이곳저곳에서 내게 유용하다 싶은 정보를 담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를 스크랩 해 온 지도 벌써 5년째이다.
'옛날 신문을 읽었다'의 작가 이승호가 서두에서 신문에 대해서 언급한 '역사는 도표화되고 도식화된 편년체로 정리할 수 있지만, (신문만큼이나) 사람들의 숨결과 땀까지 오롯이 담을 수 있을까요.'를 차치하고서라도 당장에 나에게는 신문은 더 없이 좋은 교과서이자 정보지 였다.
하나 둘 기사가 모여 한 권의 노트로 만들어 질 때 기사들 중 많은 부분은 어느새 내 교양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기분을 가질 때 신문은 내 삶의 작은 윤활유 같은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듯 신문은 고 3때부터 줄 곧 매력 있는 지침서로 때론 교양서로의 역할을 충실해 주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다시금 나의 스크랩 노트를 빼 내어 보았는데, 내가 수집한 수가지 기사 중 일부는 벌써 5년이란 역사에 묻혀 그 색이 노랗게 바래있었다. 작가 이승호는 여기에 신문의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신문은 단순한 역사와는 달리 사람들의 숨결과 땀까지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으니, 그는 신문을 통해 바쁘게 사는 세인들에게 사람다운 사람의 숨결을, 땀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기회를 그는 크게 다섯 분야로 나누어 독자들에게 제공했고, 그 시기는 1950년부터 2002년까지의 기사를 추려 자신의 생각과 함께 담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옛 기사들은 그의 생각만큼이나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50년대를 기억할 수 없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는 잔잔하게 다가와서 때론 안타까워하고 때론 격려하며, 또 때론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도우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특히나 우리 대학인이 반성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단연 두 번째로 다룬 '그때 캠퍼스에선 무선 일이 있었나?'이다. 소제목 아래 첫 번째로 다룬 '저것들이 캠퍼스에서 뒹굴다니!'
초반부에서 던진 물음은 그의 센스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이화여대 최신덕 교수의 <한국남녀 대학생의 데이트 실태>발표를 근거로 하여 대학생들의 연애관에 대한 놀라운 변화를 기술하고 있다.('1975.4.27 조선일보) 기사의 전반적인 내용은 그 당시로 '요즈음' 대학생들의 연애관이 '예전에는 가문을 보고 소개를 시켜주었다지만 요즈음은 개인 행복을 앞세운다.' '「만약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성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태도」란 설문에 남학생 30%, 여학생 27%가 "당장 절교"란에 응답했다.' 식으로 많이 바뀌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마지막 최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요즈음 우리들에게는 위의 내용들은 전혀 놀랄 일이 될 수 없다.
최 교수는 '①데이트를 하려면 대화할 수 있는 교양과 성숙이 필요하고 ②부모의 허락을 받는 것이 건전한 데이트이며 ③부모나 사회가 반대보다 이해해야 비뚤어지지 않는 올바른 이성교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고 되어있는데 여전히 고루하고 보수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신문은 현실 반영의 수단이자 매개체가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보면 또 작가 이승호가 바쁘다는 이유로 부모님과의 대화마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 현대를 사는 젊은 우리들에게 부모 세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공도 적잖이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그가 내 나라 고위 인사에게 던지는 얄밉지만 날카로운 질문은 독자로 하여금 통쾌감을 느끼게도 하며, 온정을 느끼는 기사에서는 잔잔한 감동까지 안겨다 준다.
나는 앞서도 말했지만 신문을 최상의 교과서로 교양서로 생각하는 대학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호의 '옛날 신문을 읽었다(1950∼2002)'는 나에게 신선함으로, 재미로 명쾌하게 다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훗날 내게도 만약 이승호와 같은 기질이 발동한다면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꽤 괜찮은 책 한 권을 선물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유쾌한 시간들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03.6.8)
어느새 8년이 흘렀다. 그 생각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책.
이와 비슷한 기사를 하나 찾았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60년대 경제 사정은 오늘날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런 면에서 그 시절의 소박함이 절실히 느껴졌다. 내 잔잔한 미소는 옛 사람들에 대한, 우리 어버이들에 대한 동경에서인지도 모른다. 그 어렵던 보릿고개 시절에도 입에 풀칠하는 것에 감사하며 오순도순 살았을 우리 어버이들의 절약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지 않겠는가도 새삼스레 생각하게 하는 기사였다.
오늘날은 만원 권 지폐의 가치가 하락하여 그에 따른 더 큰 단위 화폐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더 큰 화폐 발행시 장단점은 무엇인가를 보도하는데, 60년대에는 그 시절 나름대로 경제 규모의 거대화와는 상관없이 우리들 할머니들이 옥이야 금이야 아끼던 10원짜리와 50원짜리, 100원 짜리들의 수난 시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은 1968년 11월 29일 신아일보에 <거스름 짜증 유통에 대한 마찰. 권종 균형으로 시민생활 불편 없어야>란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요지다.
기사는 출근시간 '택시 속에서'란 상황 설정을 시작으로 택시기사와 손님과의 대화를 담고 있는데 이런 식이다.
운전사 "100원짜리 없어요?"
승객 "없는데요."
운전사 "잔돈으로 내요! 잔돈으로."
승객 "500짜리 밖에 없는 걸 어떡합니까?"
운전사 "에잇참. 다른 손님 요금 먼저 내시죠."
승객 "미안합니다(?)"
이렇게 대화로 시작된 기사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단박에는 기사라 보기에는 뭐하다. 하지만 그 아래 본격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써내려 간 기사의 골자는 이렇다.
'1억 원의 돈을 찍는데 100원짜리로 찍으면 100만 장인데 500원짜리로는 20만 장이다. 종이나 잉크, 인건비 같은 생산단가는 비슷하다. 조폐공사의 대 한은 납품가격은 500원짜리 한 장이 2원 60전, 100원 한 장이 1원 88전. 그러니까 1억 원을 500원으로 전부 찍어내면 비용이 52만 원, 100원짜리로는 188만 원이니 3배 이상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글로 봤을 때, 일찌감치 한국은행은 100원짜리보다는 500원짜리를 더 많이 발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시중에 유통되는 100원짜리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인데, 기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화폐의 최종 수요자는 주부요, 소시민이요, 생활인이다. 은행은 매개체일 뿐이다. 이 경제생활 주체들 사이에서 돈은 마찰 없이 유통돼야 기능을 다한다. 그리고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거스름돈의 부족이 없는 권종 균형이고 다른 하나가 화폐 품질이다.'
그리고는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다.
'권종정책은 정부 재정금융정책의 지엽이 아니라 뿌리요. 시초가 아닐까?'
요즈음은 가진 자들의 횡포로 소시민들이 힘들어하는데, 60년에는 화폐 제조 과정에서 소비되는 비용에 따른 권종 불균형에 따라서 소시민들이 힘들어하는 형국이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돈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은 매 한 가지 인가 보다.
지금까지 돈에 관련된 어제오늘의 기사를 인용해 보았다.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신문을 뒤척이다 신문 하단 광고 면에서 '제9회 영남일보 책읽기상 독서 감상문 공모합니다'를 보게 되었다. 방학을 시작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대학생 국토대장정'에 참가했던 나는 그렇게 황금같은 방학 시간 한 달을 보냈고, 8월 들어서는 곧 바로 영어 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나갈 때였다.
늘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바쁜 일상에서 독서 감상문 공모는 자신에게 또 다른 변화를 주고 싶다는 충동을 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추천도서 중에는 내가 평소 관심 갖던 신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도 있었으니 독후감 쓰기 동기 유발은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고, 또한 내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로 생각되었다.
영남일보에서 추천한 대학생 추천 도서 20권 중에서 단연 '옛날 신문을 읽었다(1950∼2002)'가 내 눈에 띠였던 것은 순전히 평소 신문 스크랩을 즐겨 하던 습관 탓에서 였다. 내가 신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내 작고도 귀중한 자산인 스크랩 노트를 보건대 1998년 2월 12일자(영남일보)에 실린 '논리로 배우는 한자공부 이름풀이'(매주 목요일마다 기획 연재)를 처음으로 스크랩을 시작했으니 고 3때부터이다.
그 당시 한자 공부에 열중했던 터라 매주 목요일에 연재되었던 '한자공부 이름풀이'를 열심히 스크랩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다음으로 스크랩된 것은 이 역시 한자 관련 기사로 같은 해 2월 14일자(영남일보) 신문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현대사회와 고사성어'란 코너에는 98년 IMF당시 '금 모으기 운동에 일부 부유층 외면 아쉬워'를 골자로 한 양포지구(楊布之狗) - '겉이 바뀐다고 속까지 바뀔까'를 절묘하게 풀이해 내고 있다.
이렇게 하나 둘씩 처음에는 한자 관련 기사를 스크랩 해 오다 신문 이곳저곳에서 내게 유용하다 싶은 정보를 담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를 스크랩 해 온 지도 벌써 5년째이다.
'옛날 신문을 읽었다'의 작가 이승호가 서두에서 신문에 대해서 언급한 '역사는 도표화되고 도식화된 편년체로 정리할 수 있지만, (신문만큼이나) 사람들의 숨결과 땀까지 오롯이 담을 수 있을까요.'를 차치하고서라도 당장에 나에게는 신문은 더 없이 좋은 교과서이자 정보지 였다.
하나 둘 기사가 모여 한 권의 노트로 만들어 질 때 기사들 중 많은 부분은 어느새 내 교양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기분을 가질 때 신문은 내 삶의 작은 윤활유 같은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듯 신문은 고 3때부터 줄 곧 매력 있는 지침서로 때론 교양서로의 역할을 충실해 주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다시금 나의 스크랩 노트를 빼 내어 보았는데, 내가 수집한 수가지 기사 중 일부는 벌써 5년이란 역사에 묻혀 그 색이 노랗게 바래있었다. 작가 이승호는 여기에 신문의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신문은 단순한 역사와는 달리 사람들의 숨결과 땀까지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으니, 그는 신문을 통해 바쁘게 사는 세인들에게 사람다운 사람의 숨결을, 땀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기회를 그는 크게 다섯 분야로 나누어 독자들에게 제공했고, 그 시기는 1950년부터 2002년까지의 기사를 추려 자신의 생각과 함께 담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옛 기사들은 그의 생각만큼이나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50년대를 기억할 수 없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는 잔잔하게 다가와서 때론 안타까워하고 때론 격려하며, 또 때론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도우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특히나 우리 대학인이 반성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단연 두 번째로 다룬 '그때 캠퍼스에선 무선 일이 있었나?'이다. 소제목 아래 첫 번째로 다룬 '저것들이 캠퍼스에서 뒹굴다니!'
초반부에서 던진 물음은 그의 센스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이화여대 최신덕 교수의 <한국남녀 대학생의 데이트 실태>발표를 근거로 하여 대학생들의 연애관에 대한 놀라운 변화를 기술하고 있다.('1975.4.27 조선일보) 기사의 전반적인 내용은 그 당시로 '요즈음' 대학생들의 연애관이 '예전에는 가문을 보고 소개를 시켜주었다지만 요즈음은 개인 행복을 앞세운다.' '「만약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성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태도」란 설문에 남학생 30%, 여학생 27%가 "당장 절교"란에 응답했다.' 식으로 많이 바뀌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마지막 최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요즈음 우리들에게는 위의 내용들은 전혀 놀랄 일이 될 수 없다.
최 교수는 '①데이트를 하려면 대화할 수 있는 교양과 성숙이 필요하고 ②부모의 허락을 받는 것이 건전한 데이트이며 ③부모나 사회가 반대보다 이해해야 비뚤어지지 않는 올바른 이성교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고 되어있는데 여전히 고루하고 보수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신문은 현실 반영의 수단이자 매개체가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보면 또 작가 이승호가 바쁘다는 이유로 부모님과의 대화마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 현대를 사는 젊은 우리들에게 부모 세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공도 적잖이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그가 내 나라 고위 인사에게 던지는 얄밉지만 날카로운 질문은 독자로 하여금 통쾌감을 느끼게도 하며, 온정을 느끼는 기사에서는 잔잔한 감동까지 안겨다 준다.
나는 앞서도 말했지만 신문을 최상의 교과서로 교양서로 생각하는 대학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호의 '옛날 신문을 읽었다(1950∼2002)'는 나에게 신선함으로, 재미로 명쾌하게 다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훗날 내게도 만약 이승호와 같은 기질이 발동한다면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꽤 괜찮은 책 한 권을 선물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유쾌한 시간들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03.6.8)
어느새 8년이 흘렀다. 그 생각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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