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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공연 리뷰

[소설] 참 잘 썼다... '가시고기'

 좋은 책은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는 것이 당연지사인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여태껏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할지라도 소설책이라면 거리를 두어왔다. 그래서 나는 양귀자니, 이외수니, 이문열이니, 하는 우리시대 내로라 하는 소설가들의 정신세계에 빠져드는 이들을 바라보며 내 멋대로 "바보"라는 이름으로 명명해버렸다. 내심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하면서도 내가 싫은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으니, 내 나름대로 소설이 싫은 이유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소설책에 빠져 작가의 정신세계에까지 빠져드는 사람들을 "바보"라며 언제나처럼 사족(蛇足)을 덧붙였다.

 우선 내가 소설 속에 빠져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는 세상에서 있을 법한 일을 이야기 거리로 만들어 꼭 현실 속의 삶인 양 곱게 포장해버린다는 자체가 싫어서였다. 단지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느냐는 식의 물음표로부터 그 해답을 찾고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짓는 것이 소설이라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여태껏 소설이라면 기껏해야 고등학교 때 시험 때문에 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님", "술 권하는 사회", "고향" 과 같은 단편과 "삼대", "상록수" 등의 중·장편의 소설 조금이 내가 숙독해낸 소설의 고작이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여하튼 나에게 있어서 소설이란 현실의 세계를 요동치게 만드는, 그것의 강도가 강하지 않다 할지라도 어쨌든 이 사회의 지극히 감성주의자들이나 혹은 이상주의자들에게만 먹혀들 것이라고 밖에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믿거나 말거나지만, 한때 신드롬을 일으키며 그렇게도 떠들썩했던 김정현의 "아버지" 조차도 딱 석 장만에 덮어야 했던 지난 배부른 시절과는 달리, 군에 와서 처음으로 읽게된 소설 양귀자의 "모순"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맺힌 내 속의 큰 응어리를 시원스레 풀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모순"에 이어 내가 "바보"라고 명명하던 그치들과 "나"라고 별반 다를 수가 없는 것이구나 - 생각하며, 그나마 내가 소설이 싫은 이유를 내 나름대로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치들을 "바보"라고 칭하면서도 평소 어리석은 짓이라 내심 느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나 역시 별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가시나무"… 앞서도 얘기했듯이 좋은 책이란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내가 처음으로 돈을 들여 발행 3일만에 산 가시나무란 책이 딱 1주가 지나서 일간스포츠 베스트셀러 도서에 당당히 1위로 뽑힌 것을 보면 소설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어쩜 없어서는 안될 요소 중의 하나라는 생각도 지울 수 가 없게된다.
 

 하얀색 표지에 주황색으로 세로로 늘여 뜨린 가시고기란 책제목이 그것이 소설이든, 수필이든, 시나리오든 간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내 눈에 띠였다는 것이고, 본문 중에서 발췌된 어린아이 말투의 애달프고도 슬프디 슬픈 글귀가 선명히 인쇄된 책자를 한 사람의 독자된 자격으로써 집어든 나로서는 구매 충동에 아무리 그것이 소설이라 할지라도 이미 "모순"을 통해서 어느 정도 소설에 대한 그간의 생각들에 나른 나른해지면서 그냥 그대로 서점 밖을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아빠뿐이고,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언제까지나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건 바로 아빠예요.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잊어버렸을까요. 
    내가 없어지면 아빠는 어떻게 될까요. 아빠 말대로 속이 시원할까요. 
    자꾸만 가시고기가 생각이 납니다.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죽어 가는 아빠 가시고기 말예요.
    내가 없어지면 아빠는 슬프고 또 슬퍼서, 정말로 아빠 가시고기처럼 될지도 몰라요.
    만약 내가 엄마를 따라서 프랑스로 가게된다면요, 아빠가 쬐금만 슬퍼했으면 좋겠어요.
    쬐금만 슬퍼하면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죠.(본문 중에서)


 아빠의 아들이 기만한 다솜이란 열 살배기 아이는 백혈병이란 불치병에 걸렸다. 그래도 다솜이는 매우 의젓한 아이이다. 아버지를 지켜보며 생각하는 아이는 같은 또래의 아이에 비해서 비록 성장 정도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한때는 촉망받는 시인의 아버지의 덕택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여튼 다솜이는 정신적으로는 열 살을 훨씬 웃도는 아이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솜이는 매일 끔찍한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빠가 보고 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아파도 아픈 것이 아닌 것처럼 잘 견뎌야 한다고 스스로 이를 악다무는 아이이다. 다솜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빠 마음은 더 아플 테니까 되려 걱정하면서 말이다.


 이런 다솜이를 어쩌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시인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땐 잘 나가는, 시를 안다는 부류들 속의 당당한 20대 기수였다. 한창 시에 빠져 마음껏 이상의 날개를 펴며 비상을 준비할 즈음 미술을 전공하는 다솜이의 엄마를 만나게 된 것이다. 전직 도지사였던 그의 장인이 될 사람은 당연히 시나 읊어대는(?) 사람이 자기 사위가 된다는 것이 못마땅해 결혼을 반대한다. 하지만 가진 집에서 자라온 다솜이 엄마는 모든 것이 사랑만 있으면 다 되는 것 인양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해버린다. 시댁과도 인연을 끊은 채…


 하지만 가정부나 부리며 20평생을 살아온 다솜이 엄마에게는 세상살이가 쉽지만은 않은 것이었으리라…. 생각과는 달리 다솜이가 둘 사이에서 일찍 자리하면서 시를 쓰는 남편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시나부랭이나 읊어대는 오늘의 남편이 원망스럽게만 느껴지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만능주의라는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돈이 없으면 행복해 질 수도 없다는 다분히 현실적인 벽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다솜이 엄마는 자식보다 화가라는 자신의 피지 못한 꽃을 피우기 위해 자식과 남편을 떠난다. 그리고 자신의 발전적인 앞날을 위해 스승과 새로운 인연을 맺으면서 프랑스로 날아간다.

 그리고 덩그러니 남게된 아버지와 아들. 하지만 아이 엄마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자에게는 곧 불행이 닥쳐온다. 아이에게 백혈병이란 반갑지 못한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아이가 생기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지난날 생각했던 자신의 시 세계를 뒤로 한 채, 아이를 위해 그리고 아내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던졌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를 느꼈던 것이다. 단지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란 이유만으로 아이의 아빠는 자신의 삶을 주저 않고 송두리째 집어던져 버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떠났고, 게다가 우리네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IMF 구제금융이란 서글픈 현실 속에서 다시 한번 세상살이의 허망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또 아내를 위해서라면 다시금 일어서야 했기에, 아빠이기 전에 한 남자로서의 자존심 따위도 버려 둔 채, 돈이라는 행복 조건을 찾아 허우적 되기 시작했다. 시를 다루는 잡지사 기자에서, 돈을 조금 더 잘 벌 수 있다는 여성전문 잡지사 기자에 이르기까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문학적 가치와는 상관이 없이 번역물을 닥치는 대로 맡아서 해야 했고, 한 아버지이기 전에 한 남자의 위치는 어디인지도 감지하지 못한 채 그렇게 세상살이에 버둥거려야 했다.


 아이가 백혈병으로 입원을 하고 난 후, 치료비를 벌기 위해 아니, 아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던 아버지였기에 마음은 늘 아들 곁이고 손은 노트북 자판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 제대로 된 삶인지 아닌지 조차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돈벌이가 될 만한 것들은 닥치는 대로 도맡아서 하게되었다. 마치 한 남자로서의 삶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새빨간 거짓말처럼 묻힌 채로….


 자신의 능력으로 돈벌이의 한계를 느끼게 될 즈음 그는 아이의 밀린 병원비를 청산하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팔려고 한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의 결정체였으리라…. 하지만 그의 신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망신 창이가 되어버렸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 탓일까, 자신의 종양말기 사실을 그제 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견디기 힘든 통증을 느끼면서도 아이가 받고 있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정작 자신의 몸은 챙기지 못한 채 아이보다 먼저 주검을 맞이하게 될 위기에 처한다.


 항암제도, 방사선 치료도 아이에게는 별 효험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지면서 골수 이식이라는 마지막 삶에로의 갈구를 해보지만, 아이와 같은 골수를 가진 이식자가 없다는 현실에서 아이의 아빠는 최후의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아이가 앞으로 살아 있는 날 동안만이라도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게 해 주자는 생각에 전세금을 빼내어 중고차를 사고 아이와 함께 둘만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아이의 병이 악화될까봐 음식부터,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까지 소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빠의 사랑 탓일까 보다.

 

 우연히 만나게 된 산 노인. 그렇게 아이가 안전하다고 느낀 산골짜기에서 아버지는 노인의 말에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갖게 된다. 젊어서 죽을병에 걸려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죽으면 죽고 살면 살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산 속으로 들어온 노인이 독사를 먹고, 산채를 먹고, 닥치는 대로 몸에 좋다는 날짐승들을 먹으면서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기이 현상으로 죽었어도 40년 전에는 죽었어야 할 사람이 지금껏 살아 있어 산에서 캔 나물들을 팔아 번 돈을 집에도 부쳐준다고 하니 그야말로 신기가 아니겠는가.


 아이도 산 속에서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노인의 말대로 날짐승에, 독사를 먹이는 정성을 아끼지 않으니, 나날이 건강이 좋아지는 것을 보고 다시금 희망을 찾게된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얼마 있지 않아 병세가 악화되면서 다시금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아이 엄마의 등장은 아이가 병세가 악화되면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에서 성공적으로 미술 공부를 마친 아이 엄마는 화려한 고국 복귀 전을 가진다. 그러면서 아이와 다시금 인연이 맺어지고, 아이 아빠의 초라한 모습에 화를 내며 아이의 권한이 자기에게도 있다고 주장한다. 형편이 나아진 지금은 자신에게 아이의 양육권을 주는 것이 아이를 위해 더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엄마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아이의 골수와 똑같은 것을 구해서 수술을 성공리에 마치며 아이는 건강을 되찾는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아빠는 주검을 초연히 받아들인다. 당연한 듯이 아이를 엄마에게 양도한다는 각서를 쓰며 아이를 엄마에게로 보낸다. 아이와 아빠의 이별대목은 가히 눈물겹다.


 아빠와 함께 소아병동 뒤에서 웃음 짓던 그 벤치에서 아빠와 생이별을 하는 것이다. 초치해진 아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아빠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밤에 아이와 마지막 만남을 기약한다. 그리고 행여나 아빠의 모습이 비쳐질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이별을 고한다. 


 아이는 엄마를 닮아서인지 미술에도 소질이 다분하다. 아이의 조각 솜씨는 뛰어나다. 아이는 조각을 즐긴다. 아이의 조각솜씨가 무르익어 갈 즈음 아이는 그렇게도 만들고 싶어하던 아빠의 두상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아빠에게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한다.


 아이는 참으로 착하다. 아빠가 엄마와 같이 살아야된다고 화를 내면 아이는 울먹이며 아빠를 애타게 부른다. 그러면서도 아빠가 엄마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자신을 타이를 줄도 안다. 아주 어른인 아이인 것이다.


 마지막 이별을 하면서 아빠는 아이가 만들어준 아빠 두상 조각을 다시금 선물한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의 두상 조각을 선물한다. 아빠 얼굴이 생각이날 때면, 아들 얼굴이 생각이날 때면, 보라며 마지막 선물을 주고받는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면서 뒤돌아서는 장면을 연상하면 코끝이 찡해지는 것은 내 감정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 일터이다.


 그렇게 아이는 엄마를 따라 프랑스로 떠나버린다.

 이제 남은 건 아빠혼자 뿐이다. 아니다. 한가지 잊고 온 것 있었다. 아빠의 잡지사 후배 되는 여진희라는 여성잡지사 기자. 이 여진희라는 여인이 이 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면에서 차지하는 것에 비해 아주 크다고 느꼈다. 한편 작가의 인물 활용법에 대해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는 독자로서 탄성을 자아낼 수밖에 없게 된다. 시종일관 아이가 아빠를, 여진희를 그리고 엄마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서술하는 방식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을 뛰고 있다.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같은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석장을 남겨두고 주인공은 여진희가 된다. 결말에서 "내가"라고 칭하는 것은 여진희 자신을 뜻하는 것이다. 시종일관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끌어가다 마지막에 가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깜짝 변신을 한 것이다. 그야말로 작가는 독자들의 상식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우리말의 유희라면 유희랄 수도 있는 것이나, 우선은 작가의 관찰력이 그리고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것 또한 무시 못할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아이 아빠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여진희라는 후배 기자였다. 아이 엄마가 떠난 후 줄곧 아이 아빠만을 너바라기 해 온 여인. 마지막까지 함께 한 사람은 아이 엄마도 아이도 아닌 여진희라는 여자였다. 


 하지만 아이 아빠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아이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다 주검을 맞는다. 아버지의 내면심리에는 필시 여진희라는 여인의 존재가 어느 정도 간직되어 있지만, "그 아이를 세상에 남겨놓은 이상은, 죽어도 아주 죽는 것이 아니래." 라며 말하는 아이 아빠에게 여진희와 아빠를 연결해주는 열쇠를 찾기란 작가로서도 매운 힘든 과제였을 터이다.

 

 단지 아빠의 의식 속에 여진희의 존재를 인식 식혀 준 것만으로 읽는 독자는 작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끝으로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에 한가지 문제점은 정말 어이없게도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내내 울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가 고민되어 졌던 것이다. 많이도, 아주 많이도 애달프고도 슬픈 얘기인데도, 코끝이 찡해옴은 느껴지되, 어찌된 영문인지 뜨거운 그 무언가는 내 볼을 타고 끝끝내 흘러내리지 못했다.

 

이 책을 덮으면서, 앞서 말한 소설에 대한 나의 억척같았던 생각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소설이야 본디 허구를 바탕으로 쓰는 것인데, 이리도 기분이 묘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차피 소설의 모티브도 우리 삶에서 비롯된다는 단순한 진리 때문일까. 아님, 소설의 묘미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기 때문일까.


갑작스레 내 아버지 얼굴이 흰 책표지 위에 그려지는 것은 또 왜 일까. 이리도 감정이 복잡다단한 것은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