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 「허공」. 시인 고은이 ‘이루었다’. 등단 50돌을 기념해서다. 모두 107편이 수록됐다. 행간에 오롯이 연륜이 읽힌다. 삶의 애환이 배어있다. 인류에 대한 애환이다. 한국시 100년 중 반세기를 함께한 그다. 하여 그의 애(哀)와 환(歡)은 곧 역사다.
그에게 ‘허공’은 맘껏 절규할 공간이요, 외침의 공간이다. 이내 평정을 되찾는 공간이다. 어떤 곳보다 평화로운 공간이다.
보게/어느날 죽은 아이로 호젓하거든/또 어느날/남의 잔치에서 돌아오는 길/괜히 서럽거든/보게/뒤란에 가 소리 죽여 울던 어린시절의 누나/내내 그립거든/보게/저 지긋지긋한 시대의 거리 지나왔거든/보게/찬물 한모금 마시고 나서/보게/그대 오늘 막장떨이 장사 엔간히 손해보았거든/보게/백년 미만 도(道)따위 통하지 말고/그냥 바라보게/거기 그 허공만한 데 어디 있을까보냐('허공' 중)고은은 본시 자연친화적이다. 불교 친화적이다. 하여 그의 언어는 경박하지 않다. 온데가 진중하다. 그 진중함은 자신에게, 때론 우리에게 향해 있다.
연사흘 그리도 흔들리던/뿌리째/흔들리던 그대/오늘은 바람 한점 모르고/꼭꼭 입 다물고/ 멈춰서 있어라/또 몇만 번/몇십만 번/머리 풀고 흔들리기 위해서/뚝 멈춰서 있어라/여기 숙연토록 세상의 억만 거짓 사절하노니('나무에게' 중)
-라며 인간의 억만 거짓 세상을 향해 ‘너희 똑바로 살라’ 비켜가듯 말하고 있다.
하나 이건 시인의 기법 중 하나일 뿐이다. 영어판인 21세기 한국을 향해서는 기어이 날을 세운다.
1910년 이전/한국은/한자 판이었다/오직 천년 당송팔대가였다/1910년 이후/한국은/일본어가 판쳤다/조선어는 쌍놈들이 썼다/조선 언문은 쌍년들이 썼다/(중략) 21세기 한국은 영어의 한국이다 오, 캘리포니아 코리아나/초상집 마당에서 간드러지는 술집 걸이에서/취하라/순 쌍년쌍놈만이 조국이다 달동네 멍멍이만이 모국어이다('언어학' 중)
노련한 시인에게도 한계란 있는 법이다. 지랄 같은 세상을 향한 일갈. 그걸 진중함만으로 이야기하기란 버거웠는지도 모른다. 때문일까. 시인은 새판을 짜고 싶은 열망이 간절하다. 이 간절함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먼저 간 벗과 지인에 대한 그리움.
소월 형/지용 형/당신네들 어렴풋이 알았을 거요/인류 맨 처음의 언어가/아아/였던 것/(중략) 아아/아아/이 막무가내의 아아들이 나에게 펄펄 내려앉고 있소/저 하늘의 마지막 손수건인가보오/('눈 내리는 날' 중)
상렬아/병석아/병만아/달모야 양식아/땅달보 양식아/문태 동생 순태야/깍쟁이 영섭아/대식아/이제쯤 다 가버린 그 녀석들 제삿날 밤/그 이름 하나하나 부르고 싶어라/('갯벌' 중)
시인은 많이 외롭다. 만년에 방랑자처럼 유독 해외를 떠돌았다. 그곳에서도 벗과 친구를 떠올렸다. 그 투는 꼭 회한이 서린 것 같다. 그러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상형문자로 돌아가고 싶다/나의 문명/이대로는 안되겠다/왜 세상은 날이 날마다 1,2,3,4 따위 값을 먹이는가/자고 나면/왜 값이 올라가는가/왜 세상은/너도 나도/얼마짜리인가/왜 얼마짜리로/여기저기 팔려가는가/왜 얼마짜리로/미쳐버리는가 미쳐 날뛰는가/아, 공짜배기 내 고향 어디로 가버렸는가/그동안 어설픈 거리 오락가락 살아온 서푼짜리의 나/이제 무일푼의 나로 돌아가/감히/여기 몽골 테질레 풀밭쯤 여기 근원쯤/차라리/차라리/차리라/닭으로부터/아니 달걀로부터 시작하고 싶다/('울란바트르의 마음' 중)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도 고백한다.
생각하건대 나 또한/거지 중의 상거지임에 틀림없습니다/시의 한구절을 시의 한구절과 한구절 사이의/빈 데를/그제도/그 이튿날에도 얻어보려고/안 나오는 젖 빨아대며/이 꼭지 저 꼭지 배고픈 아기 주둥이 파고들기를/마다하지 않았습니다('라싸에서' 중)실제로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건 상거지만큼이나 애달프고, 처절한 일인 지도 모른다. 하나 시인은 반세기를 한국시와 함께 해온 그 가락을 살려, 「허공」은 “굳이 감회를 내세울 것도 없다. 오늘이라는 것이 어제와 내일 사이에 죽자 사자 있어주어서 여간 고맙지 않다. 이를테면 이 시집은 그런 ‘오늘’일 것이다.”라고 무덤덤하게 말한다.
아내의 사진을 바라보았다/울음이 이루어졌다/('집' 중)에서 ‘이루어졌다’는 간절한 바람이 아니다. ‘마침 딱 그때’, 참 자연스러운 것이다. 등단 50주년 기념「허공」도 요란스러운 게 아니다. 시인은 이미 다음 시집 제목도 ‘멧비둘기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로 정해뒀다. 「허공」은 한두해 전의 시집 다음이다. 또한 한두 해 내지 몇해 뒤에 나올 시집의 앞이 이것이기도 하다. 시인에게 시집이란 그런 것이다. 천상 시인다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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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시인에게 돌아갔다.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던 날, 노벨문학상 단골후보 고은 집으로 수백명의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어떤 기자들은 고은의 집으로 향하다 수상자 소식을 전해듣곤, "에이씨" 한마디 짜증스럽게 하고, 차를 돌려 돌아갔다. 노벨문학상은 스포츠가 아니다. 금메달을 땄다고 기뻐할 일이고, 노메달에 그쳤다고 김빠질 일도 아니다. 문학은 본시 독자가 좋아하고, 인정하는 게 으뜸이다. 고은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말라. 고은은 그냥 시인일 뿐이다. 고은은 운동선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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