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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박스T2-사회] 사이코패스

#. 남미南美 작가로는 드물게 우리에게 친숙한 파울로 코엘료. 그의 소설 '11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아홉 주일이 지나는 동안, 그녀는 습관에 따라 금요일마다 영성체를 받으며 성모 마리아에게 간구했다. 이 도시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한동안 그녀는 마음을 앓았고, 소년의 소식을 묻고 다녔다. 하지만 소년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마리아는 깨달아갔다. 세상은 너무 넓고, 사랑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그녀는 생각했다. 성모 마리아가 계시는 하늘나라는 너무나 멀어서 아이들의 소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라고.(p20)

#. 2004년 여름은 뜨거웠다. 불청객 '열대야'가 한반도를 짜증스럽게 달궈놓았다. 시민도, 경찰도, 기자도 짜증스럽긴 매한가지였다. 특히 서울 경찰의 불쾌지수는 극도에 달했다. 마포에는 특별수사팀이 가동됐다. 연쇄살인범을 근 1년간 뒤쫓고 있던 터였다. 부녀자를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용의자는 좀체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살인 소식이 전해오자, 경찰은 죽기만큼 괴로웠다. 언론은 연일 '무능한 경찰'이고 쏘아붙였다. 주검은 발견되는데, 범인의 흔적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마치 암운이 감도는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경찰의 갑갑증과 짜증은 열대야와 함께 묵직해져갔다.


#. 범인 검거는 시간 문제로 보였다. 하나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희생자는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큼 많이 나왔다. 그런 뒤 범인이 잡혔다. 그 해 7월 18일이었다. 범인은 평범한 30대 남성으로 보이는 유영철. 유는 2003년 8월부터 1년 간 21명을 죽였다. 그의 이름 앞엔 '희대의 살인마'란 별칭이 따라다녔다. 유의 살해 대상은 주로 부유층 노인과 여성이었다.

#. 그의 범행 수법은 과감하면서도 치밀했다. 살인도구는 자신이 직접 만든 망치나 칼이었다. 범행 현장에서
 범인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은 이유다. 유는 증거인멸을 위해 부러 불을 지르거나 시체를 토막내 야산에 묻었다. 유는 여느 살인자와는 달랐다. 체포된 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꼿꼿이 목을 세웠다. 목소리까지 높였다. 유는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해하는 한 시민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검정색 모자와 흰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 유에게는 애시당초 죄의식이란 없었던 거다. 전문가는 그를 '사이코패스(psychopath·반사회적 성격장애자)'라고 결론 내렸다. 사이코패스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을 신처럼 대단한 존재로 평가하고 △감정적으로 냉담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사이코패스로는 미국의 '살인마' 게리 리언 리지웨이가 있다. 리지웨이는 1982년부터 84년까지 48명을 살해했지만 20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심지어 30년 간 직장을 다녔다. 
 

#. 경찰은 유영철을 붙잡고 한숨 돌리나 했다. 하나 경찰로선 '대형사건'이 터졌다. 백주대낮에 경찰 2명이 살해당했다. 범인은 도주했다. 서울
서부경찰서 소속 심모(32)경사 등 2명은 내연녀의 신고로 폭행부분에 대해 합의를 보러 온 남성을 체포하려다 변을 당했다. 마포구 노고산동 C커피숍에서였다. 범인은 8일만에 빌라에서 체포됐다. 범인은 이학만. 그는 평범한 30대 남성이었지만, 동료애와 괘씸죄가 더해져 8일만에 몸값이 5천만원으로 뛰었다. 

#. 필자는 2004년 당시 두 사건을 근거리에서 목도할 기회가 있었다. 중앙일보 대학생 인턴기자였다. 선배의 지시를 받고 이학만 어머니 인터뷰를 위해 집앞에서 '뻗치기'를 했다. 5시간 가량 흘렀을 때다. 이학만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컴컴한 지하방으로 들어섰다. 필자는 후다닥 뒤따라 들어섰다. 어머니는 의외로 친절하게 맞아줬다. 인터뷰에도 응해줬다. 그러다 이학만의 어머니는 5분만에 입장을 바꾸었다. 신변보호를 위해 따라붙은 경찰인 줄 착각했던 거였다. 덕분에 필자는 어머니와 인터뷰할 수 있었지만, 지면에는 게재되지 않았다. 같이 인턴을 했던 현 KBS 해피투게더 조연출 김성민 PD가 하루 앞서 아버지 인터뷰를 성공해 보도됐는데, 그 내용과 대동소이했기 때문이다.

#. 하나 5시간 기다려 얻어낸 귀한 인터뷰는 필자에겐 많은 생각을 안겨다줬다. 다음은 어머니와의 일문일답. 
 
- 교회를 다녔다는데?
"몇 년 됐다. 내가 얼마나 하느님께 빌고 또 빌었는데, 매일 울면서 기도했다. 우리 애 앞으로는 죄 안 짓고 올바른 사람 해 되게 해 달라고. 그런데 하느님도 안 계신 것 같고 이제 믿기 싫다. 사건 나고는 기도도 안 한다."

#. 필자는 이 대목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의 위 내용이 떠올랐다. 죄인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나, 돌연 떠나버린 첫 사랑을 만나게 해달라고 성모 마리아에게 비는 창녀 마리아나,(그러나 그녀 역시 순결한 동정녀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하느님의 사랑을 못 받은 건 매한가지인 듯 싶어서다.

#. 다만 하나는 소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현실이라는 것이 필자로 하여금 다른 감정을 갖게 만들었다. 아무리 슬퍼도 여자 따위야 또 만나면 그만이지만, 씻지 못할 죄를 지은 아들을 두게 된 어머니 마음은 다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 이학만 어머니는 필자 앞에서 "이날 이태껏 살아도 남한테 피해 한 번 주지 않은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오열했다. "우리 아들은 효자는 아니었어도 악한 아이는 아니었다"며 "지금쯤 학만이도 후회하고 있을 거야"라고 고개를 떨궜다.

#. "하느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는 이학만의 모친 말이 왜 그렇게 와닿던지. 살인자의 엄마의 심정은 타인의 감정선을 건드릴만큼 절박했다는 방증 아닐까 싶다.

#. '현실과 소설은 분명 이렇게나 다른 것이었음을...' 
절규하는 이학만의 모친을 만나는 20분 동안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라면...'
필자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 2004년 여름은 필자에겐 아린 추억이다.